마켓인사이트 10월29일 오후 4시30분

현금 조달을 위한 대기업들의 자산 매각에 빨간불이 켜졌다. 사모펀드(PEF) 등에 지분, 자산을 팔려던 계획이 잇따라 중단되거나 미뤄지고 있다. PEF에 돈을 대는 연기금, 공제회 등 이른바 ‘큰손’ 투자자들이 위축되고 있어서다. 웅진, STX, 동양 등 중견그룹의 연이은 부실 사태 여파로 분석된다.

29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PEF 운용사인 큐캐피탈은 동부익스프레스 경영권 인수에 투자할 펀드 투자자(LP)들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교직원공제회가 투자를 보류했고, 국민연금, 새마을금고 등은 국회 국정감사 이후로 투자 검토를 미뤘다.

큐캐피탈 관계자는 “대부분의 연기금들이 서로 투자하겠다며 경쟁할 정도였다”며 “동양그룹 부실 사태 이후 분위기가 움츠러들었다”고 털어놨다.

산업은행은 그동안 추진해온 현대로지스틱스 유상증자를 잠정 중단했다. 해당 기업들은 은행 대출, 회사채, 기업어음(CP) 발행 등 통상적인 자금 조달이 어려운 상황에서 ‘구원투수’ 역할을 해온 PEF마저 움츠러들어 핵심 자산 매각을 통한 구조조정에 차질을 빚게 됐다.

현대그룹은 당초 올해 말까지 산업은행 사모펀드(PEF)를 통해 현대로지스틱스에 약 1100억원을 투자받는 방안을 협의해왔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펀드 출자자를 모으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동양 사태가 돌발변수가 됐다”고 말했다. IB업계는 현대그룹이 검토 중인 다른 계열사 자산 매각도 쉽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부토건이 추진해온 서울 역삼동 르네상스서울호텔 매각도 난항을 겪고 있다. 인수 측인 이지스자산운용 PEF에 투자하기로 했던 일부 연기금이 마음을 돌렸기 때문이다. 르네상스호텔 노조의 반대에 부담을 느끼던 터에 잇따른 대기업 부실 사태까지 겹치자 투자 철회를 결정했다. 앞서 삼부토건은 채권단에 빌린 7500억원(원금 기준)을 갚기 위해 작년부터 호텔 매각을 추진했고 지난 5월 우선협상대상자로 이지스자산운용을 선정했다.

PEF의 지분 투자는 대부분 기업들이 펀드에 후순위 출자를 하는 방식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구조다. 이 때문에 자금을 굴릴 곳이 마땅치 않은 연기금 등에 인기가 높았다. 주식을 동종업체 등에 넘기기 부담스러운 대기업에 이들 PEF가 자금 젖줄 역할을 해왔다.

동부익스프레스 경영권 매각의 경우 전체 매각대금 3500억원의 10%를 동부그룹이, 10%를 큐캐피탈 등 운용사가 후순위로 출자한다. 외부 투자자들은 2800억원을 선순위로 투자하면 된다. 여기에 서울고속터미널 지분 11.1%(1300억원), 비업무용 부동산(1300억원) 등 동부익스프레스가 현금화할 수 있는 자산 규모는 3000억원을 웃돈다. 사실상 회사가 망해도 원금을 건질 수 있는 구조다. 기대 수익률은 10%가 넘는다.

현대로지스틱스 자본 유치도 마찬가지다. 현대그룹이 계열사를 통해 전체의 절반가량을 후순위로 출자하고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이 10%가량을 투자한다. 연기금 대체투자팀 관계자는 “상당히 매력적인 투자구조”라며 “평소라면 안전하다는 판단에 쉽게 투자를 결정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기금 사이에 ‘대기업들이 후순위 출자를 맡더라도 위험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는 게 문제다. 시장에서 조금이라도 우려가 나오는 기업엔 투자하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이진우 군인공제회 대체투자본부장은 “당분간 기업에 대한 주식 형태 투자는 보류할 계획”이라며 “대신 인프라, 부동산 등 실물투자에 눈을 돌리고 있다”고 말했다.

성기섭 교직원공제회 자금운용본부장은 “연말이 되면 신규 투자보다는 기존 투자 관리에 눈을 돌리기 때문에 기업 투자건은 더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예상했다.

박재흥 금융감독원 사모펀드팀장은 “연기금들이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 잣대 중 하나는 운용사의 투자 및 회수 능력인 만큼 대기업들은 인수 가격, 조건뿐 아니라 운용사의 투자 성적과 평판까지 종합적으로 따져보고 지분 매각에 나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좌동욱/고경봉/심은지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