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호표 대신 진동음…年100억 팔죠"
‘삐삐’로 불리던 무선호출기가 부활하고 있다. 1990년대 말 휴대폰에 자리를 내줘 사라지는 듯했던 무선호출기는 커피숍 등 매장에서 ‘지루한 기다림을 달래주는 진동기’로 제2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삐삐의 변신은 국내 무선호출기 시장의 90%를 차지한 리텍의 이종철 사장(52·사진)이 주도하고 있다. 그는 “요즘 은행과 병원 등 새로운 거래처를 개척하고 있다”며 “한층 유쾌하고 편안한 기다림 문화를 창출하겠다”고 말했다.

◆부도회사 나와 창업

전기전자공학을 전공한 이 사장은 삐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1990년대 한 중견그룹에서 개발자로 일했다. 그러나 1997년 말 외환위기가 터지고 그룹이 공중분해되자 1998년 무선호출기 전문기업 리텍을 창업했다.

사업 아이디어는 회사를 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떠난 미국 출장길에서 떠오른 것이었다. 한 대형 푸드코트에서 주문을 마친 손님에게 무선호출기를 나눠주는 것을 보고 삐삐의 새로운 가능성에 눈을 떴다. 이 사장은 “바로 미국으로 날아가 제품을 보고 돌아온 뒤 개발에 매달렸다”며 “도면과 사업계획서만으로 은행에서 2억원을 빌려 창업했다”고 말했다.

◆해외시장 먼저 공략

이 사장은 무선호출 기능을 갖춘 진동기를 개발한 뒤 해외 시장을 먼저 두드렸다. 판매시점관리(POS) 시스템을 공급하는 업체가 매장에 필요한 무선호출기 선택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미국 대도시에 있는 POS 업체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거래를 텄다.

그는 “가문의 명예를 걸고 사업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내 성(姓)과 테크놀로지를 합친 ‘리텍’으로 사명을 지었다”며 “글로벌 기업이 되기 위해선 해외에서 인정받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는 패밀리 레스토랑 아웃백이 2004년 가장 먼저 리텍에 ‘러브콜’을 보냈다. 베니건스도 고객이 됐다.

자신감이 붙은 이 사장은 2006년 커피 전문점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소비자는 언제일지 모르는 자기 차례를 무작정 기다리고, 종업원은 음료 나왔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문화를 바꿔야 한다는 데 모두 공감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지금은 커피빈 빈스빈스 아티제 투썸플레이스 커핀그루나루 등 카페베네를 제외한 모든 유명 커피 브랜드가 리텍 제품을 쓴다. 국내 고객사만 2700여곳에 달하고 54개국에 수출한다. 작년 매출은 100억여원이다.

◆새 먹거리 무궁무진


리텍이 요즘 공들이고 있는 시장은 병원과 은행이다. 이 사장은 “성형외과에서는 신분 노출을 꺼리는 환자들이 가명을 써 이름을 불러도 자기인 걸 몰라 진동기 사용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 시장 개척도 진행 중이다. 이 사장은 “‘딩동’하는 불필요한 소음을 없앨 수 있고 1회용 종이 번호표보다 환경친화적이라 좋다”며 “국민은행 신한은행이 본사 차원에서 몇몇 지점에 시범 적용하고 있어 테스트가 끝나면 금융권으로 본격 확대될 것”으로 예상했다.

부천=김병근 기자 bk1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