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사무실서 몰래보는 '야동'의 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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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동 : 야구 동영상 >
포털 배너광고 크기로 '위장'…블루투스 이어폰 끼고 힐끔힐끔
정말 '반짝'입고 끝난 유광점퍼
거금 들여 어렵게 구했는데…중고 장터에 벌써 헐값 매물 '씁쓸'
가을 야구의 추억
"다저스, 다 졌어도 즐거웠다"…Ryu can do! I Love Ryu! 온 사무실이 류현진 앓이
오후 2시, 모니터 뚫을 기세…평소엔 꾸벅꾸벅 졸던 시간, 한국시리즈 예매 '분노의 클릭'
포털 배너광고 크기로 '위장'…블루투스 이어폰 끼고 힐끔힐끔
정말 '반짝'입고 끝난 유광점퍼
거금 들여 어렵게 구했는데…중고 장터에 벌써 헐값 매물 '씁쓸'
가을 야구의 추억
"다저스, 다 졌어도 즐거웠다"…Ryu can do! I Love Ryu! 온 사무실이 류현진 앓이
오후 2시, 모니터 뚫을 기세…평소엔 꾸벅꾸벅 졸던 시간, 한국시리즈 예매 '분노의 클릭'
지난 20일 서울 잠실 야구장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4차전 두산베어스 대 LG트윈스 경기. 8회말 2-1로 앞선 두산의 최준석이 오른쪽 담장을 넘기는 솔로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MBC 청룡 시절부터 30년간 LG 팬인 정 차장(LG전자)은 절규했다. ‘괜찮아. 그래도 1점밖에 내주지 않았어’라며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관전 모드로 들어가려는 순간 두산 오재일이 쐐기를 박는 3루타를 날렸다. 중견수 박용택이 공을 놓치며 허둥대는 사이 LG는 허무하게 또 2점을 내줬다. 결국 5-1로 경기 종료. 11년 동안 기다렸던 ‘가을 야구’의 꿈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나 한잔 하면서 쓰린 속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얄미운 이 부장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일부터 일 열심히 해라.” 정 차장은 한숨을 쉬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더니, 가을 야구는 무슨….”
연말 인사 시즌이 다가오는 요즘, 스트레스 쌓인 직장인들에게 야구는 삶의 낙이다. 류현진이 뛰고 있는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진출이 좌절되고 한국시리즈 진출 팀이 판가름 난 지난 주말은 야구팬들에게 ‘격동의 한 주’였다. 야구에 울고 웃었던 김과장 이대리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I MISS RYU
넥센타이어에 근무하는 류 과장의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는 ‘I LOVE RYU’다. ‘류(Ryu)’는 류현진 선수를 의미한다. 같은 류씨인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해 좋아하는 문구다. 그는 올해 넥센타이어가 LA다저스와 공식 파트너십을 체결한 이후 류 선수의 ‘열혈팬’이 됐다. 얼마 전 류 과장의 회사는 LA다저스를 응원하는 독특한 슬로건을 선정해 LA다저스의 다음 시즌 경기를 관전할 수 있는 항공권과 숙박권을 주는 이벤트를 열었다. 그는 메모지에 ‘RYU CAN DO(류는 할 수 있다)’라고 써서 사무실 책상 앞에 붙여놓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19일 날아든 LA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진출 좌절 소식에 ‘멘붕(멘탈붕괴)’에 빠졌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해도 가슴에 와 닿는 문구가 생각나지 않네요. 내년 4월까지 류 선수가 뛰는 모습을 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의욕도 없고…. ‘I MISS RYU(나는 류가 그립다)’로 프로필도 바꿀 겁니다.”
올해는 류 선수의 호투로 사무실 곳곳에서 몰래 야구를 보는 김과장 이대리들이 적지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LA다저스 경기를 틀어놓는 ‘출석체크족’이나 포털 사이트의 광고 배너 크기에 맞춰 생중계 화면 크기를 줄인 다음 일하는 척하면서 경기를 관람하는 ‘대담족’은 평범한 축에 속한다.
증권사에 다니는 박 사원은 ‘지능형 범죄족’이다. 이어폰을 가릴 수 있도록 구레나룻과 옆머리를 기르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자 검은색 블루투스 이어폰을 구입해 한쪽에만 끼고 중계를 들었다. 그런 박 사원에게도 들킬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한번은 경기에 너무 몰두해 있던 나머지 조용한 사무실에서 ‘아!’ 하고 소리를 질러버렸죠. ‘아아’ 하고 목을 푸는 척 헛기침을 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는데 표정관리를 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유광점퍼’가 뭐길래
지난 8월 LG트윈스가 18년 만에 정규 리그 1위에 오르자 응원 필수품인 ‘유광(有光) 점퍼’가 일찌감치 동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광이 번쩍번쩍 나는 LG트윈스 유니폼으로 LG 박용택 선수가 2011 시즌 때 “가을엔 추우니까 유광점퍼 사 입고 오세요”라는 말을 남기며 핫 아이템으로 떠오른 제품이다. LG팬들에게 이 ‘점퍼’는 가을 야구의 상징이 됐다. 올해는 한여름인 8월에도 춘추용 점퍼 구매 문의가 폭주해 조기 품절 사태가 빚어졌다. 얼마나 구하기 힘들었으면 한 인기 연예인에게 팬이 이 점퍼를 선물한 일을 두고 ‘유광점퍼 조공 바치기’라는 뒷말까지 나왔다. 권희원 LG전자 홈엔터테인먼트(HE) 사업본부장(사장)도 지인에게 줄 유광점퍼를 구하느라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LG상사에 근무하는 공 대리도 어렵게 수소문해 남자친구와 커플로 ‘신상(신상품)’ 유광점퍼를 구매했다. 두툼한 재질의 겨울용은 한 벌에 20만원이 넘는다. 큰맘 먹고 40만원의 거금을 들인 공 대리는 LG의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면서 점퍼를 한 번밖에 입지 못한 채 옷장에 고이 모셔두게 됐다. “벌써부터 인터넷 중고장터에 유광점퍼가 헐값으로 나오는 걸 보니 씁쓸하네요.”
○오후 2시 예매 전쟁
LG를 꺾고 5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두산은 축제 분위기다. 두산중공업에 근무하는 백 사원은 “일요일 밤 개그콘서트가 끝날 무렵이면 다음날 출근할 생각에 우울했는데 이렇게 월요일이 기다려진 적이 없었다”며 “이번주는 동료들과 야구 얘기만 할 것”이라고 한껏 들떠 있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박용만 두산 회장이 취임한 후 두산팬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후문이다. 박 회장은 두산 경기를 꼭 챙겨보는 야구광이다. 그는 두산의 한국시리즈행이 결정된 20일에도 경기를 보다가 트위터에 “게임 더 끌었으면 (미국 출장행)비행기를 놓칠 뻔했다”고 글을 올렸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롯데 골수팬이던 부산 출신 직원 중에서도 갑자기 두산 팬으로 변절해 ‘회장님 라인’으로 옮기는 사례가 있다”고 귀띔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야구에 관심 없는 여직원들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다. 건설회사에서 일하는 윤 과장은 사무실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그는 이달 들어 오후 2시만 되면 사무실에 이상한 분위기가 도는 걸 감지했다. 남자 직원들이 오후 2시, 3시, 4시 정각이 되면 마우스를 클릭하며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약 10분간 ‘분노의 마우스 클릭’이 끝나면 ‘에이~’ 하는 장탄식이 흘러나오면서 우르르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장면이 목격됐다. 알고 보니 플레이오프 온라인 예매가 시작되는 시간이 2시, 3시, 4시인데 직원들 네 명이 같이 가기로 하고 동시에 예매를 시도했던 것. 윤 과장은 “야구 경기 하나에 이렇게들 열광하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전예진/황정수/박한신 기자 ace@hankyung.com
집 근처 포장마차에서 소주나 한잔 하면서 쓰린 속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얄미운 이 부장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일부터 일 열심히 해라.” 정 차장은 한숨을 쉬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더니, 가을 야구는 무슨….”
연말 인사 시즌이 다가오는 요즘, 스트레스 쌓인 직장인들에게 야구는 삶의 낙이다. 류현진이 뛰고 있는 미국 메이저리그 LA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진출이 좌절되고 한국시리즈 진출 팀이 판가름 난 지난 주말은 야구팬들에게 ‘격동의 한 주’였다. 야구에 울고 웃었던 김과장 이대리들의 사연을 들어봤다.
○I MISS RYU
넥센타이어에 근무하는 류 과장의 카카오톡 프로필 문구는 ‘I LOVE RYU’다. ‘류(Ryu)’는 류현진 선수를 의미한다. 같은 류씨인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해 좋아하는 문구다. 그는 올해 넥센타이어가 LA다저스와 공식 파트너십을 체결한 이후 류 선수의 ‘열혈팬’이 됐다. 얼마 전 류 과장의 회사는 LA다저스를 응원하는 독특한 슬로건을 선정해 LA다저스의 다음 시즌 경기를 관전할 수 있는 항공권과 숙박권을 주는 이벤트를 열었다. 그는 메모지에 ‘RYU CAN DO(류는 할 수 있다)’라고 써서 사무실 책상 앞에 붙여놓고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나 19일 날아든 LA다저스의 월드시리즈 진출 좌절 소식에 ‘멘붕(멘탈붕괴)’에 빠졌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해도 가슴에 와 닿는 문구가 생각나지 않네요. 내년 4월까지 류 선수가 뛰는 모습을 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의욕도 없고…. ‘I MISS RYU(나는 류가 그립다)’로 프로필도 바꿀 겁니다.”
올해는 류 선수의 호투로 사무실 곳곳에서 몰래 야구를 보는 김과장 이대리들이 적지 않았다. 출근하자마자 스마트폰으로 LA다저스 경기를 틀어놓는 ‘출석체크족’이나 포털 사이트의 광고 배너 크기에 맞춰 생중계 화면 크기를 줄인 다음 일하는 척하면서 경기를 관람하는 ‘대담족’은 평범한 축에 속한다.
증권사에 다니는 박 사원은 ‘지능형 범죄족’이다. 이어폰을 가릴 수 있도록 구레나룻과 옆머리를 기르는 치밀함까지 보였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자 검은색 블루투스 이어폰을 구입해 한쪽에만 끼고 중계를 들었다. 그런 박 사원에게도 들킬 뻔한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한번은 경기에 너무 몰두해 있던 나머지 조용한 사무실에서 ‘아!’ 하고 소리를 질러버렸죠. ‘아아’ 하고 목을 푸는 척 헛기침을 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했는데 표정관리를 하느라 힘들었습니다.”
○‘유광점퍼’가 뭐길래
지난 8월 LG트윈스가 18년 만에 정규 리그 1위에 오르자 응원 필수품인 ‘유광(有光) 점퍼’가 일찌감치 동나는 사태가 벌어졌다. 광이 번쩍번쩍 나는 LG트윈스 유니폼으로 LG 박용택 선수가 2011 시즌 때 “가을엔 추우니까 유광점퍼 사 입고 오세요”라는 말을 남기며 핫 아이템으로 떠오른 제품이다. LG팬들에게 이 ‘점퍼’는 가을 야구의 상징이 됐다. 올해는 한여름인 8월에도 춘추용 점퍼 구매 문의가 폭주해 조기 품절 사태가 빚어졌다. 얼마나 구하기 힘들었으면 한 인기 연예인에게 팬이 이 점퍼를 선물한 일을 두고 ‘유광점퍼 조공 바치기’라는 뒷말까지 나왔다. 권희원 LG전자 홈엔터테인먼트(HE) 사업본부장(사장)도 지인에게 줄 유광점퍼를 구하느라 진땀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LG상사에 근무하는 공 대리도 어렵게 수소문해 남자친구와 커플로 ‘신상(신상품)’ 유광점퍼를 구매했다. 두툼한 재질의 겨울용은 한 벌에 20만원이 넘는다. 큰맘 먹고 40만원의 거금을 들인 공 대리는 LG의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되면서 점퍼를 한 번밖에 입지 못한 채 옷장에 고이 모셔두게 됐다. “벌써부터 인터넷 중고장터에 유광점퍼가 헐값으로 나오는 걸 보니 씁쓸하네요.”
○오후 2시 예매 전쟁
LG를 꺾고 5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두산은 축제 분위기다. 두산중공업에 근무하는 백 사원은 “일요일 밤 개그콘서트가 끝날 무렵이면 다음날 출근할 생각에 우울했는데 이렇게 월요일이 기다려진 적이 없었다”며 “이번주는 동료들과 야구 얘기만 할 것”이라고 한껏 들떠 있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박용만 두산 회장이 취임한 후 두산팬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후문이다. 박 회장은 두산 경기를 꼭 챙겨보는 야구광이다. 그는 두산의 한국시리즈행이 결정된 20일에도 경기를 보다가 트위터에 “게임 더 끌었으면 (미국 출장행)비행기를 놓칠 뻔했다”고 글을 올렸다. 대한상의 관계자는 “롯데 골수팬이던 부산 출신 직원 중에서도 갑자기 두산 팬으로 변절해 ‘회장님 라인’으로 옮기는 사례가 있다”고 귀띔했다.
물론 이런 일들이 야구에 관심 없는 여직원들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다. 건설회사에서 일하는 윤 과장은 사무실에서 유일한 여성이다. 그는 이달 들어 오후 2시만 되면 사무실에 이상한 분위기가 도는 걸 감지했다. 남자 직원들이 오후 2시, 3시, 4시 정각이 되면 마우스를 클릭하며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 약 10분간 ‘분노의 마우스 클릭’이 끝나면 ‘에이~’ 하는 장탄식이 흘러나오면서 우르르 담배를 피우러 나가는 장면이 목격됐다. 알고 보니 플레이오프 온라인 예매가 시작되는 시간이 2시, 3시, 4시인데 직원들 네 명이 같이 가기로 하고 동시에 예매를 시도했던 것. 윤 과장은 “야구 경기 하나에 이렇게들 열광하는 걸 보면 신기할 따름”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전예진/황정수/박한신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