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위안부나 징용노동자 등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최소 26년가량 유지한 정황이 드러났다.

가와카미 시로 변호사는 17일 일본 중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연에서 “일본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는 견해를 밝혔는데, 이런 사실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정부에 배상청구권이 소멸했느냐고 물으면 “한일협정에 의해 ‘법적 의무’가 없어졌다”고 답하지만, 법적 의무와 개인의 청구권은 차이가 있다며 과거 일본 정부가 청구권에 관해 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을 소개했다.

주미 일본대사를 지낸 야나이 순지씨가 외무성 조약국장으로 근무하던 1991년 8월 27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개인의 청구권 그 자체를 국내법적인 의미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는 답변을 했다고 밝혔다. 가와카미 변호사는 야나이 전 국장이 “이것(청구권협정)은 한일 양국이 국가로서 지닌 외교적인 보호권을 서로 포기한다는 의미”라고 전제하고서 이렇게 설명했다고 전했다.

이는 협정에 따라 일본 정부가 일본에서의 청구권을 없앴을 때 한국 정부가 이에 대항할 외교적 수단을 포기·상실하게 될 뿐 개인 청구권 자체가 소멸한다고 볼 수 없다는 2012년 한국 대법원 판결과 맥을 같이한다. 야나이 전 국장이 참의원에 출석해 한 발언은 일본이 외교적 보호권과 개인청구권의 구분을 장기간 유지했다는 근거가 된다.

앞서 일본은 1965년 한일협정 전후에 작성한 외무성 내부 문서에서 ‘외교보호권’과 ‘개인 청구권’의 개념을 법적으로 구분하고 “한일협정으로 포기한 것은 외교보호권일 뿐 개인 청구권은 남아있다”고 밝힌 사실이 2010년 3월 드러났다. 또, 당시 외무성이 내놓은 답변이 ‘말 바꾸기’일 것이라는 추정에 크게 무게가 실린다.

가와카미 변호사는 일본이 개인 청구권과 외교 보호권을 구분한 다른 사례도 제시했다. 그는 “원폭 투하 피해자가 ‘정부가 미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한 탓에 미국에 대한 청구권이 없어졌다’며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냈을 때 일본 정부는 배상 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으니 미국을 상대로 재판하라는 답변을 했다고 설명했다.
박병종 기자 dda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