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찰' 자임한 엉클 샘…자유수호·獨善 두개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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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이슈 따라잡기 - 시리아 사태로 본 美 군사개입의 역사
2차대전후 러시아와 패권 다투며 곳곳 개입
베트남·이라크전 '명분 불분명'…비난 거세
2차대전후 러시아와 패권 다투며 곳곳 개입
베트남·이라크전 '명분 불분명'…비난 거세
“미국은 스스로 국제질서를 수호할 의무가 있다고 느끼며, 이 같은 신념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관철한다.”
미국 외교학자 앤드루 바세비치는 최근 출간한 ‘워싱턴 룰’에서 미국이 전쟁을 멈추지 않는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대외 정책을 견지하는 버락 오바마 정부가 시리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추진하는 것에서 보듯 미국은 전통적으로 무력 사용에 적극적인 모습을 취해왔다. 국제사회는 이 같은 움직임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상당 부분 의지하는 등 모순적인 반응을 보인다. 미국의 군사개입은 때로는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때로는 의도치 않은 실패를 맛봤다.
○적극적 군사개입 정책의 뿌리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외국에 적극적인 무력행사를 한 것은 1846년부터 2년간 벌어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다. 캘리포니아 등 태평양 연안에 대한 영유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에서 미국은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점령하는 대승을 거뒀다. 정경원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 교수는 “미국의 압승은 이후 미국이 더 호전적이 되고 라틴아메리카를 자신들의 안방으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며 “협상보다는 무력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미국의 군사적 행동 대상은 아메리카대륙과 필리핀 등 일부 태평양 연안 국가에 한정됐다. 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가 제창한 먼로주의를 내걸고 유럽 열강의 갈등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세계패권을 다투게 되면서 미군의 군사 행동 반경은 전 세계로 확대됐다.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는 것이 대외 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 데 따른 것이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도 이 같은 맥락에서 적극적인 군사개입이 이뤄졌다. 미군의 직접적인 참전 없이 군사적 개입을 수행하는 ‘저강도 전쟁’ 전략도 나왔다. 친미세력의 무장과 훈련을 지원해 반미 성향 정부를 전복시키거나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게 하는 방식이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소련) 붕괴로 경쟁 상대가 사라지자 미국은 ‘세계 경찰국’에서 군사적 개입의 명분을 찾게 된다.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세계 경찰을 자임하며 평화를 지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명시적인 적이 사라지면서 미군은 걸프전에서 이라크와, 보스니아전쟁에서는 세르비아 민병대와 싸웠다.
2001년 9·11 테러로 미국의 군사개입은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알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의 싸움이 최우선 과제가 됐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벌어진 전쟁은 2011년 오사마 빈라덴의 사살과 이라크전 종전 선언으로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불분명한 전쟁 명분
이 같은 미국의 군사개입은 종종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국제사회의 동의 절차를 밟지 않는 것은 물론 개입 대상국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1989년 마누엘 노리에가 당시 파나마 국가원수 체포를 위해 진행된 파나마 침공이 대표적인 예다. 외국 지도자를 압송해와 마약밀매 혐의로 자국 법정에 세운 것이다. 한때 미국은 노리에가를 통해 니카라과 우익 반군을 지원하는 등 친밀한 관계였지만 노리에가가 독자노선을 취하려 하자 실각시켰다는 분석이다. 파나마 운하 이용을 위한 미국의 지정학적 이익 관철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군사개입 명분 자체가 조작되기도 했다. 1964년 미국은 베트남 연안 통킹만을 정찰 중이던 구축함 매덕스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베트남에 지상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1981년 매덕스호 함장은 북베트남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2005년에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역사학자에 의해 통킹만 사건은 당시 정부의 의도적인 사실 왜곡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제거와 알카에다와의 연결 차단을 명분으로 내걸었던 2003년 이라크전쟁 역시 명분이 약했음이 밝혀졌다. 대량살상무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고 알카에다와의 연계 증거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 먼저 군사개입 요구
몇몇 ‘무리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국제사회가 먼저 미국의 군사개입을 요청한 사례도 많다. 미군 측의 인명피해가 불가피한 만큼 미국 내에서도 군사개입에 부정적인 여론이 만만치 않다.
1992년 시작돼 인종 학살로 무수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던 보스니아전쟁은 1995년 미국이 공군력을 동원해 세르비아 민병대를 공격하면서 종식됐다. 1993년 정권을 잡은 빌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은 군사 행동에 소극적이었지만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거듭된 설득에 입장을 바꿨다.
내전으로 300만명이 기아로 사망한 소말리아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실행됐던 1992년 소말리아 군사개입도 미국에 상처만 남겼다. 민간인에 대한 식량 공급을 방해하는 반군 근거지를 공격하는 와중에 미군 18명이 사망한 것이다. 발가벗겨진 미군 헬리콥터 조종사 시신이 모가디슈 시내 한가운데에서 군중들에 짓밟히는 사진이 보도되면서 여론이 악화돼 미군은 서둘러 철수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
미국 외교학자 앤드루 바세비치는 최근 출간한 ‘워싱턴 룰’에서 미국이 전쟁을 멈추지 않는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대외 정책을 견지하는 버락 오바마 정부가 시리아에 대한 군사개입을 추진하는 것에서 보듯 미국은 전통적으로 무력 사용에 적극적인 모습을 취해왔다. 국제사회는 이 같은 움직임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상당 부분 의지하는 등 모순적인 반응을 보인다. 미국의 군사개입은 때로는 명분이 뚜렷하지 않았고 때로는 의도치 않은 실패를 맛봤다.
○적극적 군사개입 정책의 뿌리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처음으로 외국에 적극적인 무력행사를 한 것은 1846년부터 2년간 벌어진 미국·멕시코 전쟁에서다. 캘리포니아 등 태평양 연안에 대한 영유권을 두고 벌어진 전쟁에서 미국은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점령하는 대승을 거뒀다. 정경원 한국외국어대 스페인어과 교수는 “미국의 압승은 이후 미국이 더 호전적이 되고 라틴아메리카를 자신들의 안방으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며 “협상보다는 무력이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까지 미국의 군사적 행동 대상은 아메리카대륙과 필리핀 등 일부 태평양 연안 국가에 한정됐다. 5대 대통령인 제임스 먼로가 제창한 먼로주의를 내걸고 유럽 열강의 갈등에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과 세계패권을 다투게 되면서 미군의 군사 행동 반경은 전 세계로 확대됐다.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는 것이 대외 정책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 데 따른 것이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쟁 등도 이 같은 맥락에서 적극적인 군사개입이 이뤄졌다. 미군의 직접적인 참전 없이 군사적 개입을 수행하는 ‘저강도 전쟁’ 전략도 나왔다. 친미세력의 무장과 훈련을 지원해 반미 성향 정부를 전복시키거나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게 하는 방식이다.
1991년 소비에트연방(소련) 붕괴로 경쟁 상대가 사라지자 미국은 ‘세계 경찰국’에서 군사적 개입의 명분을 찾게 된다. 유일한 초강대국으로서 세계 경찰을 자임하며 평화를 지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라는 명시적인 적이 사라지면서 미군은 걸프전에서 이라크와, 보스니아전쟁에서는 세르비아 민병대와 싸웠다.
2001년 9·11 테러로 미국의 군사개입은 다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알카에다를 비롯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의 싸움이 최우선 과제가 됐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벌어진 전쟁은 2011년 오사마 빈라덴의 사살과 이라크전 종전 선언으로 일단락되는 분위기다.
○불분명한 전쟁 명분
이 같은 미국의 군사개입은 종종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국제사회의 동의 절차를 밟지 않는 것은 물론 개입 대상국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1989년 마누엘 노리에가 당시 파나마 국가원수 체포를 위해 진행된 파나마 침공이 대표적인 예다. 외국 지도자를 압송해와 마약밀매 혐의로 자국 법정에 세운 것이다. 한때 미국은 노리에가를 통해 니카라과 우익 반군을 지원하는 등 친밀한 관계였지만 노리에가가 독자노선을 취하려 하자 실각시켰다는 분석이다. 파나마 운하 이용을 위한 미국의 지정학적 이익 관철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군사개입 명분 자체가 조작되기도 했다. 1964년 미국은 베트남 연안 통킹만을 정찰 중이던 구축함 매덕스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의 공격을 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베트남에 지상군을 파견했다. 하지만 1981년 매덕스호 함장은 북베트남 측으로부터 공격을 받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2005년에는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역사학자에 의해 통킹만 사건은 당시 정부의 의도적인 사실 왜곡으로 일어났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대량살상무기 제거와 알카에다와의 연결 차단을 명분으로 내걸었던 2003년 이라크전쟁 역시 명분이 약했음이 밝혀졌다. 대량살상무기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고 알카에다와의 연계 증거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제사회 먼저 군사개입 요구
몇몇 ‘무리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국제사회가 먼저 미국의 군사개입을 요청한 사례도 많다. 미군 측의 인명피해가 불가피한 만큼 미국 내에서도 군사개입에 부정적인 여론이 만만치 않다.
1992년 시작돼 인종 학살로 무수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던 보스니아전쟁은 1995년 미국이 공군력을 동원해 세르비아 민병대를 공격하면서 종식됐다. 1993년 정권을 잡은 빌 클린턴의 민주당 정권은 군사 행동에 소극적이었지만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거듭된 설득에 입장을 바꿨다.
내전으로 300만명이 기아로 사망한 소말리아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실행됐던 1992년 소말리아 군사개입도 미국에 상처만 남겼다. 민간인에 대한 식량 공급을 방해하는 반군 근거지를 공격하는 와중에 미군 18명이 사망한 것이다. 발가벗겨진 미군 헬리콥터 조종사 시신이 모가디슈 시내 한가운데에서 군중들에 짓밟히는 사진이 보도되면서 여론이 악화돼 미군은 서둘러 철수했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