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 시내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마네사르 공단의 한 공장. 파산으로 문을 닫은 이 공장의 정문에는 압류딱지가 붙은 채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다. 인근 공장의 직원은 “은행 빚을 갚지 못해 가동이 중단됐다”고 설명했다. 델리=이정선 기자
델리 시내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마네사르 공단의 한 공장. 파산으로 문을 닫은 이 공장의 정문에는 압류딱지가 붙은 채 자물쇠가 굳게 채워져 있다. 인근 공장의 직원은 “은행 빚을 갚지 못해 가동이 중단됐다”고 설명했다. 델리=이정선 기자
“계약이 되면 뭐합니까. 돈이 손에 들어와야죠. 인도 쪽 수입상들이 신용장 개설을 안 해주는데 무슨 수로 거래를 하겠습니까. 거래가 자꾸 늦춰져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델리에서 만난 한국 기업 A사 현지법인장은 이렇게 하소연했다. 산업재료를 수출하는 이 회사는 몇 달째 제대로 된 매출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현지 수입상들이 계약에 동의했지만, 정작 신용장 개설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어서다. 그는 “인도 수입업체들이 달러로 결제하기 때문에 루피화 환율이 안정되기를 기대하면서 신용장 개설을 늦추고 있다”고 답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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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또 “환율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그대로 반영했다간 거래처가 다 떨어져 나갈 판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고 속을 끓였다. 루피화 환율 상승 쇼크로 경제가 어려워진 요즘 인도시장의 풍속도다.

◆생산현장도 환율 상승 직격탄

올 들어 달러당 52~55루피 사이를 오가던 루피화 환율이 본격적으로 오르기 시작한 것은 지난 5월 하순부터다. 정점을 이룬 건 사상 최고치인 68.83을 기록한 지난달 28일. 스타 경제학자 출신 라구람 라잔이 인도 중앙은행(RBI) 총재로 임명된 지난 4일을 고비로 환율은 다소 진정되는 모양새지만 달러당 65.24루피(6일 기준)로 5월 이전보다는 아직 통화 가치가 20% 정도 떨어진 상태다.

루피화 절하는 생산 현장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난 3일 방문한 마네사르 공단도 환율의 파고가 덮친 흔적이 역력했다. 자동차용 부품을 생산하는 인도 기업 루맥스의 경우 지난 4월부터 7월까지 매출이익이 7% 가량 떨어졌다. 주력 상품인 도어핸들, 미러 등을 제작할 때 필요한 수입 원재료 조달비용이 올랐기 때문. 이 회사의 수크비르 싱 기술·무역담당 이사는 “전체 제품 비중 가운데 수입 원재료 비중이 32%가량을 차지해 이윤이 크게 줄었다”며 “비용 절감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10명 정도의 비정규직을 해고하고 신규 고용을 중단한 상태”라고 말했다.

주변 공장 사정은 훨씬 심각했다. 공단 내엔 외벽에 압류 딱지가 붙은 채 주먹만한 자물쇠가 채워진 공장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인근 공장에서 근무하는 한 직원은 “법원 청산절차에 들어간 공장”이라며 “주변에만 10개 정도의 공장이 이곳처럼 은행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문을 닫았다”고 귀띔했다.

◆휘발유 값 대폭 인상

루피화 가치 하락은 인도 내수시장에도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다. 전체 물량의 80%를 수입하는 석유시장이 대표적인 분야. 인도 석유회사들은 지난 2일 항공유 가격을 6.87% 올렸다. 휘발유 가격도 6월 이후 L당 11.1루피(약 181원·이달 3일 기준), 액화석유가스(LPG) 가격은 1월 대비 한 통에 46.5루피(약 758원) 올랐다. 각종 생필품 가격도 치솟고 있다. 채소, 빵, 우유 등 장바구니 물가상승에 생활비가 크게 늘고 있다. 델리의 화학소재 관련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슈프리 갬비르 씨는 “매달 1만루피(약 16만7000원) 정도를 저축했으나, 올 들어 생활비가 크게 늘어 2000루피(약 3만3000원)로 줄였다”고 하소연했다.

물가가 오르면서 내수시장의 시름도 깊어지고 있다. 인도 최대 명절인 디왈리(Diwali) 축제를 겨냥한 특수는 기대할 수 없다는 비관적 전망이 팽배하다. 오는 11월 디왈리 축제를 앞둔 2~3개월간의 예비 축제기간은 친인척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풍습 덕에 매출이 급신장하는 성수기다.

사감 일렉트로닉스의 디팍 반살 사장은 “이맘때면 제품 최종 구매에 앞서 방문객이 크게 늘며 분위기가 고조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올해는 전혀 그런 기미를 느낄 수 없다”고 전했다. 인도 일간 힌두스탄타임스는 3일 머리기사로 “연료비 상승이 축제의 열기를 짓밟기 시작했다”고 꼬집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전제품 업체들은 공급 일정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푸네의 한 외국계 완성품 대형가전 업체에 부품을 납품하는 K사 관계자는 “원청업체에서 판매 부진으로 한 달치 계획을 세우지 못해 보름 단위로 물량 납기 일정을 건네받고 있을 정도”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기업들 비상대책 수립

자동차 시장도 소비심리가 위축되고 있다. 델리 시내에 총 5개 자동차 판매 영업장을 운영하는 슈미 케어 씨는 “매달 600대 정도 팔리던 인도 마힌드라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판매 대수가 최근 400대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애를 태웠다.

인도 경제지 이코노믹타임스에 따르면 시장 점유율 1위인 마루티 스즈키를 비롯해 2위인 현대자동차, 폭스바겐 등은 부품 현지화 전략이나 수출 확대에 주력하면서 활로 모색에 한창이다. 현대차는 인도 전용 모델인 소형차 ‘Eon’ 등을 내세운 공격적인 내수 판로 확충과 더불어 아프리카 등의 수출 물량을 늘리기로 했다. 김언수 델리 판매마케팅팀 부장은 “현대 인도법인은 그나마 내수와 함께 수출을 병행하고 있어 환리스크를 어느 정도 헤지할 수 있는 상황”이라며 “현재 30%가량의 수출 비중을 더 늘려 충격파를 최소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반면 벤츠는 루피화 하락과 수입 관세 증가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이달부터 인도 판매 차량 가격을 4.5% 올렸다.

델리·뭄바이·푸네=이정선 기자 sun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