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사양산업의 눈물…파업 탄광촌에 피어난 소년 발레리노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사양산업의 눈물…파업 탄광촌에 피어난 소년 발레리노
열한 살 소년은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낡은 글러브를 건네받았다. 소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형 모두 이 글러브로 권투를 배웠다고 했다. 소년이 사는 곳은 영국 북부의 한 탄광촌. 이곳의 남자들은 대부분 복싱을 하면서 석탄을 캤다. 소년의 친구는 “그 글러브는 너무 오래되고 낡았다”고 타박했지만 소년 빌리(제이미 벨 분)는 망설임 없이 복싱 체육관에 들어선다. 하지만 빌리의 눈에 먼저 띈 것은 뜻밖에도 발레수업 모습. 영화는 그가 체육관 한쪽 발레교실의 피아노 소리에 발걸음을 멈추는 데서 시작된다. 영국 탄광마을의 발레소년 이야기 ‘빌리 엘리어트’(2000년 개봉)다.

파업의 경제학

아버지는 빌리에게 하루치 복싱 교습비 50센트를 주면서 신신당부한다. “힘든 상황에서 어렵게 만든 돈이다. 아껴 써야 해.” 그도 그럴 것이 탄광촌은 기약 없는 파업에 돌입한 상태였다. 영국 정부가 174개 국영 탄광 중 적자를 낸 20곳을 폐쇄하고 2만여명의 광부를 해고한 데 대한 탄광노조의 대응이었다. 광부인 아버지와 형도 파업에 참여하면서 빌리네 집엔 수입이 뚝 끊겼다. 계속된 파업으로 집에 쌓아둔 석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아버지의 걱정에 빌리의 형은 이렇게 말한다. “걱정 마세요. 조금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겨요.”

형이 이렇게 자신한 이유는 파업이 산업과 경제에 줄 수 있는 타격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통상 노조가 조직적으로 작업을 거부하면 협상 주도권은 노조에 쥐어진다. 파업은 기업의 생산량을 줄여 이윤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기업이나 정부는 노조의 요구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파업을 이끄는 탄광 노조는 일종의 카르텔이다. 다른 카르텔과 마찬가지로 공급자 또는 생산자들이 연합해 시장지배력을 행사하려는 조직이다. 노동 공급자들의 담합은 적자 광산을 폐쇄하려는 정부의 시도를 무위로 돌릴 것이라는 게 빌리 형이 자신감을 갖는 근거였다.

아버지와 형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동료들을 비난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카르텔에 참여하지 않는 공급자가 나오면 카르텔의 견고함에 문제가 생긴다. 그들은 파업을 기피하는 동료들을 향해 “배신자는 용납할 수 없다”며 달걀을 던지고 침을 뱉는다. 탄광으로 향하는 버스를 가로막고 욕을 퍼붓기도 한다. 생계난을 견디지 못해 작업현장에 복귀하는 이들은 옛 동료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사양산업의 눈물…파업 탄광촌에 피어난 소년 발레리노

노조의 두 가지 목표

통상 노조가 추구하는 목표는 고용 안정과 임금소득 증가다. 하지만 두 목표는 양립하기 힘들다. <그래프1>의 우하향하는 노동수요곡선에서 볼 수 있듯이 임금이 높아지면 노동 수요는 줄어들기 때문이다. 노조의 압박으로 <그래프2>처럼 임금을 균형임금 A보다 높은 수준으로 올리게 되면 보통 노동의 공급량은 늘고 수요량은 줄어 실업이 발생한다.

노조가 파업을 통해 고용을 보장받더라도 마찬가지다. 무리한 고용으로 인한 기업(정부)의 이익률이 줄어들면 여타 부문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적자 탄광을 유지하느라 쓴 비용만큼 다른 곳에 활용할 여력이 줄기 때문이다. 빌리가 만난 한 남자가 광부들의 파업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도 같은 이유다. “몇몇 탄광은 분명히 비효율적이야. 정리할 건 깔끔하게 정리해야지.”

하지만 빌리는 아버지와 형의 파업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어떤 문제를 낳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저 빨리 문제가 해결돼 가족들이 좀 편해졌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그는 아버지가 어렵게 마련한 50센트를 들고 발레교실로 향한다. 물론 아버지에겐 알리지 않았다.

런던엔 탄광이 없다는 아버지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사양산업의 눈물…파업 탄광촌에 피어난 소년 발레리노
빌리의 재능은 특출났다. 몸은 가벼웠고 리듬감도 타고났다. 발레 선생님은 빌리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봤다. “넌 정말 재능이 있구나. 조금만 더 연습한다면 런던의 유명 발레학교 입학도 가능하겠어.” 그날부터 선생님과 빌리는 특훈에 돌입한다. 런던에 간다는 꿈에 한껏 부푼 빌리는 아버지에게 슬며시 묻는다. “아버지, 런던은 어떤 도시예요?” 돌아온 아버지의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다. 갈 이유가 없지. 거기엔 탄광이 없잖아.”

영화 속에서 이미 탄광산업은 쇠락해가고 있는 상태였다. 석유 사용이 늘면서 이전에 많이 쓰이던 자원 수요가 확 줄었는데, 대표적인 게 바로 석탄이었다. 산업구조가 변하는 상황에서 마찰적 실업(→산업구조의 변화에 수반되는 ‘필연’)은 불가피하다. 사양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이 새로운 부문에서 일자리를 찾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석탄에서 석유사업으로 노동력이 옮겨 가는 것처럼 산업 간 혹은 지역 간 노동 수요와 공급 구성의 변화를 ‘부문 간 이동(sectoral shifts)’이라고 한다. 부문 간 이동은 필연적으로 마찰적 실업을 부른다.

이런 상황에서 아버지와 형은 광부 일을 접고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게 맞다. 하지만 영화 속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모든 근로자가 어느 직장에서든 능수능란하게 일을 해낼 수 있다면 구직에 큰 어려움이 없겠지만, 탄광촌의 광부들은 광산을 벗어난 삶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 산업 간 노동공급 이동은 말처럼 쉽지 않다. 시간도 많이 걸린다. 특히 한 기업이 지역의 모든 근로자를 고용하는 이른바 ‘기업도시’의 경우 시민들의 타산업 접촉도가 낮기에 이동은 더욱 힘들어진다. 탄광촌이 대표적이다.

로열극장에서 날아오른 탄광 소년

[영화로 쓰는 경제학원론] 사양산업의 눈물…파업 탄광촌에 피어난 소년 발레리노
파업이 계속 이어지면서 빌리네 가계 사정은 더욱 쪼들리게 된다. 아버지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쓸 땔감을 만들기 위해 죽은 아내가 애지중지하던 피아노를 부쉈다. 파업을 포기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상황.

빌리는 이날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춤을 춘다. 날 듯이 몸을 놀리는 빌리를 보고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는다. “탄광의 시대는 끝났구나. 빌리를 이곳에서 내보내줘야 하는구나.” 하지만 막상 런던으로 오디션을 보러 갈 차비마저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는 아내의 유품인 목걸이를 전당포에 내놔 돈을 마련한다. 탄광 동료들은 빌리네 사정을 듣고 십시일반 쌈짓돈을 모아 내놨다.

사양산업 종사 인력을 배려하기 위한 공공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이 같은 배경에서 나온다. 정부가 근로자들이 다른 직종으로 이직할 수 있도록 교육비 등을 지원하자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산업구조에서 생겨나는 마찰적 요인들을 줄이기 위해선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반면 정부의 개입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직업교육과 구직 과정은 민간영역에 맡기는 게 더 효율적이란 것이다.

빌리에게 발레학교 합격통지서가 온 날, 석탄노조는 오랜 파업 끝에 백기를 든다. 아버지와 형은 쇠락해가는 광산으로 돌아가고, 빌리는 런던으로 떠난다. 마지막 장면은 이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뒤다. 아버지와 형이 함께 찾은 런던 최고의 로열극장. 무대에 선 무용수 빌리가 한껏 날아오르는 순간, 평생 석탄을 캐온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영화는 끝난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

시네마노믹스 자문 교수진 가나다순

▲송준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이창민 한양대 경영학과 교수 ▲정재호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 ▲한순구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