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말부터 새로운 세계가 생겼다. 바로 사이버(cyber) 세상이다. 온라인, 디지털이라고도 불리는 드넓고 신비한 세상에서 우리는 새로운 신원(identity)을 갖게 됐다. 현실 세계의 나와 같은 사람이지만 사이버에서 움직이는 ‘또 다른 나’는 전혀 다른 특질을 갖고 있다.
익명성이 가장 눈에 띄는 보호막이다. 10만명이 넘는 연예인 팬클럽 사이트에서 나를 드러낼 방법도 이유도 없다. 나는 조용한 팬으로 지켜볼 뿐이다. 싫으면 다른 곳으로 가면 그만이다. 아무도 모른다.
지울 수 없는 사이버 세상 흔적
현실에서는 남들의 눈을 신경 쓰지만 사이버에선 내 마음대로 한다. 백화점에선 비싼 것만 고르는 신사일 수 있지만, 여행사이트에선 20대들과 경쟁하며 1만원이라도 더 싼 상품을 찾는 하이에나가 되기도 한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활성화되면서 사이버 세상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현실 세계에선 친구가 한 명도 없는 사람이 페이스북에선 전 세계 친구 수천 명과 매일 교류한다. 이런 시대에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사람을 상대로 물건을 팔아야 하는 회사들은 한발 더 나아간 질문을 해야 한다. 우리의 고객은 누구인가.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저 사람들인가. 아니면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미소짓는 그들인가. 현실과 사이버의 경계는 점점 더 옅어질 것이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배두나가 읊조린 대사를 기억해보라. “모든 경계는 관습일 뿐이다.”
분명한 것은 사이버 세상의 위력이 날로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전 같으면 해프닝으로 끝났을 일도 사이버 세상에 알려지면 ‘전 국민 청문회’가 된다. 연예인 사회지도층인사 등 공인은 물론이요, 일반인들까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는다. 한 사람은 약하지만 뭉치면 강해지는 힘, 이것이 요즘 말하는 소셜(social)의 폭발력이다.
문제는 수천년간 법률 규칙 관습 관행 등이 쌓여온 현실 세계와 달리 사이버 세상에서는 이런 것들이 전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사이버 여론은 여전히 평균보다 하향화되면서 마녀사냥의 성격을 지워버리지 못하고 있다.
사생활 보안 의식이 필수 규범화
앞으로 사이버에서 활동하는 ‘나’에 대한 관리가 점점 중요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이버 세상에 자신이 언제 어디서나 노출돼 있음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공인이라면 사진도 함부로 찍지 말고, 발언도 녹음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할 것이다. 정보통신을 기반으로 한 사이버는 본질상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개인들의 기억이나 자료가 자주 누락되는 오프라인과는 질이나 스케일이 전혀 다르다. 이제 내 트위터는 내 자신이요, 나와 관련된 소문은 항간이 아니라 전 세계에 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사이버 세상이 지켜보고 있는 한 ‘디지털 주홍글씨’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추세다.
구글 회장인 에릭 슈밋의 말을 새겨 들어야 할 것 같다. “부모는 자식과 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훨씬 전에 사생활과 보안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새로운 디지털 세계’ 중)
공인들은 사이버 세상에서 낭패 보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요, 기업인들은 그 세상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아내야 한다.
권영설 편집국 미래전략실장 yskw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