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국인, 상위 7%에게 복지비용을 떠넘기다
한국인들의 빈약한 공동체 정신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증세를 거부하면 복지도 사절해야 당연하지만, 복지는 받고 납세는 다른 7.1%의 소수 국민에게 바가지 씌우는 결과에 이르고 말았다. 공동체의 가치를 발견해내고 유지할 책임이 있는 정치는 오히려 그런 기회주의적 선택을 강요하는 방향으로 정부를 몰아갔다. 다중의 힘과 여론을 앞세워 세금 없는 복지를 강제로 밀어붙이는 식이라면 나라 살림은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어렵다.

박근혜 대통령의 원점 재검토 지시로 기획재정부는 어제 세제 개편 수정안을 새누리당에 보고했다. 세 부담이 늘어나는 봉급생활자의 기준을 종전 연봉 3450만원에서 5500만원(OECD 기준 중산층 상한)으로 높이고 5500만~7000만원 근로소득자는 종전 16만원이던 연간 세 부담 증가액을 2만~3만원으로 대폭 낮춘다는 것이다. 연봉 3450만~5500만원 소득자의 세 부담은 변동이 없고 7000만원까진 한 달에 2000~3000원 정도 늘어나는 수준이니 불만을 잠재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세 부담이 늘어나는 봉급생활자는 종전 434만명(소득 상위 28%)에서 205만명(13.2%)으로 대폭 줄어든다. 이 중 100만명은 연 2만~3만원 늘어나는 데 그치고, 실질적으로 세 부담이 크게 증가하는 사람은 상위 7.1%에 해당하는 110만명이다. 결국 당정의 세제 개편 수정안은 복지 확대로 인한 증세 부담을 상위 7%에게만 떠안기는 비열한 결론에 도달하고 말았다. 세금은 공동체 살림의 기초다. 보편적 복지는 더욱 그렇다. 복지 선진국 그 어느 나라건 복지 비용은 극빈층을 제외한 전 국민이 보편적으로 부담한다. 극빈자에 대한 자비적 복지는 부자들이 부담하지만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급식 노령연금 등 보편적 복지는 중산층 모두가 십시일반의 정신으로 공동 부담하는 것이 사회의 기본이다. 바로 이것이 북유럽 국가들의 조세부담률이 36%대에 달하는 이유다.

하지만 정부는 일부 봉급생활자의 반발과 야당의 정치 공세에 우왕좌왕한 끝에 “서민·중산층 지갑을 얇게 하지 말라”는 대통령의 한 마디에 아예 소수를 볼모로 잡는 정책을 선택하고 말았다. 스스로 ‘증세 없는 복지 확대’의 덫에 걸려 국민을 설득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수정안이 그대로 확정돼 시행된다면 앞으로 복지 재원 확보는 물론 세금 자체에 대한 광범위한 기피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두고두고 선례가 될 가능성도 크다. 이제 그 어떤 정당이 세금을 올리자는 이야기를 꺼내겠는가 말이다. 민주당이 중산층 세금폭탄이라고 목청을 돋운 데 대해 좌파 시민단체조차 ‘정치적 자살행위’라고 비판한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무책임하고 어리석게도 새누리당은 정부 비난에 앞장섰다.

복지 공약에 5년간 135조원이 더 필요하지만 이 돈을 지하경제 양성화와 세 감면 축소와 세출 조정으로 메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정부 안에도 거의 없다. 당장 올 상반기 세수가 예산 대비 9조4061억원이나 구멍났다. 여기에다 세제 개편으로 걷을 수 있는 세금이 종전 1조3000억원에서 수정안대로라면 9000억원으로 줄어든다. 이것은 또 무엇으로 메울 것인가. 새누리당은 수정안으로 무마하자는 식이고 민주당은 이명박 정부 시절의 법인세 인하까지 회수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법인세 인하 경쟁이 치열한 데다 한국의 법인세수는 이미 GDP의 3.5%로 OECD 평균(2.9%)보다 훨씬 높다. 법인세 인상은 말 그대로 거위털이 아니라 거위를 잡아먹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지금도 법인세나 소득세는 상위 10%가 세수의 80~90%를 부담하는 정도다. 보편적 복지를 말하려면 세금 부담도 공유해야 마땅하다. 누릴 것은 다 누리면서 “돈은 내가 아닌 네가 내라”는 식이라면 더 이상 공동체는 없다. 원칙의 박근혜 정부가 놀라운 변칙을 만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