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남친과 갔다던 '모솔'의 여행, 동료 안믿자 결국 "남쪽 모친과…"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이라면 휴가의 양면성을 누구보다 잘 안다. 휴가 한 달 전부터는 고참이 갈궈도 그다지 괴롭지 않다. 중대장이나 행보관(행정보급관·옛 인사계)과 마주치면 힘차고 절도 있는 거수경례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1주일간의 휴가가 막바지로 접어드는 5일째부터는 슬슬 걱정이 되고 부대 복귀 전날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다. 복귀하고 나서는 한동안 넋이 나간 ‘좀비’ 같다. 불과 며칠 전 일이 모두 꿈만 같다.

군대를 사회로, 부대를 회사로 바꿔 놓아도 크게 다르지 않다. 모든 휴가는 양날의 칼, 휴가와 휴가 후유증은 동전의 양면이 아닐까. 휴가가 꿈처럼 좋았든, 꿈이 산산조각 나는 ‘재앙’이었든 휴가 후유증은 직장인들이 극복하기 쉽지 않은 ‘병’이다.

○휴가 후유증, 현실과 꿈 사이

대기업 A사에 다니던 정 주임(남·31)은 지난해 바쁜 업무 탓에 여름휴가를 가을에 뒤늦게 갔다. 휴가지를 미국 뉴욕으로 정한 정 주임. 올여름 못지않은 폭염이었던 작년 여름 날씨에 완전히 지쳐버린 그는 영화 ‘뉴욕의 가을’에 나오는 멋진 배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휴가는 잔잔한 멜로가 아니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급 재난 영화 같았다. 하필 그가 도착했을 때 허리케인 샌디가 미국 동북부를 강타하면서 휴가 내내 대피소에서 보급품으로 생활하며 보내야 했던 것. 휴가 마지막 날이 다가왔지만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는 결국 회사에 연락해 남은 연차 5일을 모두 쓰고 나서야 대피소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에게 동료들은 ‘허리케인 정’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그런데 ‘허리케인 정’의 휴가 후유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평소 시민의식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재난에 대처하는 미국인들의 질서정연한 모습과 낯선 동양인에게 베풀어 준 따뜻한 관용에 큰 감동을 받았다. 결국 회사를 그만두고 시민사회에 대해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났다. 나비의 날갯짓이 허리케인을 만들고, 허리케인의 폭풍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생생한 모습을 목격한 회사 동료들은 요즘도 그의 소식을 궁금해한다는 후문.

B전자회사에 다니는 차 대리(여·31)도 비슷한 경우다. 대학생 때 어학연수를 했던 영국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온 그는 연수 때와는 다른 풍요로움을 느끼고 돌아왔다. 빠듯한 생활비 때문에 라면과 빵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때로는 돈도 벌어야 했던 그때와는 달리 깔끔한 호텔에 묵으며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었기 때문이다.

바쁜 직장생활에 지쳐 있던 그는 영국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짧은 순간 ‘퇴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다시 어학연수 시절로 돌아가기는 싫었던 차 대리. 회사의 영국지사 근무를 노려보기로 하고 한국에 돌아오자 마자 장기 계획을 세웠다. 그는 요즘 퇴근 후 회사의 지역전문가 과정과 비즈니스 영어회화 수업을 듣는다. 동기야 어찌됐든 여름휴가가 자기계발을 위한 좋은 계기가 된 셈이다.

○산산조각 난 상상…내 남자는 어디에

중견기업에 다니는 C씨(여·29)는 ‘모태솔로’다. 최근까지도 남자를 찾아 헤매던 그를 안쓰럽게 여기던 동료들은 그가 “이번 여름휴가 때 남자 친구와 함께 일본 오키나와에 다녀왔다”고 하자 ‘못 믿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또 다른 동료들은 한술 더 떠 ‘그에게 남친을 소개시켜준 게 소셜데이팅 업체냐, 결혼정보 업체냐’를 놓고 갑론을박을 벌여 C씨에게 다시 한 번 상처를 입혔다. 남친의 존재 여부를 놓고 사내 논란이 증폭되자 그는 “남친은 ‘남쪽에 계신 모친’의 줄임말”이었다고 털어 놔야 했다. C씨는 동료들 사이에서 ‘가련한 모태솔로’로 낙인 찍히는 후유증을 감내해야 했다.

단짝 친구와 1주일간 미국 서부 여행을 떠난 D사의 이 대리(여·32)는 캘리포니아의 낭만에 대한 기대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현지 분위기를 있는 그대로 느끼기 위해 미국 여행사를 수소문해서 예약했고, 영어회화도 열심히 공부했다. 잘생긴 미국 청년들과 호텔에서 파티를 하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광경을 떠올리며 흐뭇해했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이 났다. 알고 보니 여행사는 미국 회사를 가장한 중국 회사였고 일행 50명 가운데 미국 노부부 한 쌍을 제외하고는 모두 중국인이었다.

더구나 가이드는 중국인 손님들을 위해 1주일 내내 중국 식당으로 안내했다. 그것도 미국식 퓨전 중국 음식이 아닌 향신료 냄새 물씬 풍기는 현지 중국식을 내오는 집들만 골라서. 여행 안내도 영어가 아닌 중국어로 했다. 친구와 함께 “미국 남자들과의 스킨십을 조심하자”고 다짐까지 했던 이 대리는 1주일간 진정한 ‘멘붕(멘탈붕괴)’을 경험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분명 미국에 다녀왔는데 귀에서는 중국어가 맴돌고…. 이 대리는 한동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주말마다 이태원의 클럽을 전전했다.

○휴가의 추억 못 잊는 아내…“괴로워요”

대기업 계열 전자회사에 다니는 김 대리(남·33)는 여름휴가 때 아내와 함께 태국에 다녀왔다. 평소 ‘몸이 뻐근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아내를 위해 특별히 계획한 여행이었다. 한국에선 마사지 비용이 비싸 데려가지 못했는데, 여름휴가를 겸해 마사지로 유명하고 비용도 싼 곳에 가서 그동안 미안했던 마음을 풀겠다는 갸륵한 생각이었다.

오전엔 발, 오후엔 전신 마사지를 받으며 3박4일을 보낸 이들 부부. 아내는 “몸이 한결 개운해졌다”고 함박웃음을 지었지만, 김 대리는 한국에 돌아와 이내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태국에서의 경험을 잊지 못한 아내가 사흘에 한 번씩 마사지숍을 다니면서 돈을 물 쓰듯 쓰고, 이마저도 태국 같지가 않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 김 대리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며칠 전부터 인터넷을 보며 마사지 기술을 연마하는 중이다. 그는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퇴근 후 마사지 기술을 공부한 뒤 밤 늦게 실습하고 있다”며 “어느 순간부터 투잡족이 된 느낌”이라며 피로를 호소하고 있다.

박한신/황정수/강경민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