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금융산업은 퇴직연금이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드니 금융가엔 슈퍼애뉴에이션 펀드가 매입한 건물이 많다.  /시드니=조재길 기자
호주 금융산업은 퇴직연금이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드니 금융가엔 슈퍼애뉴에이션 펀드가 매입한 건물이 많다.  /시드니=조재길 기자
호주 시드니의 북쪽에 있는 부촌 체스우드. 지난 16일 현지에서 만난 레지나 미니 씨(46)는 “매달 주택 대출금을 갚아야 하다보니 여유자금이 많지 않지만 퇴직연금이 있어 노후 걱정은 하지 않는다”며 “남편이 가끔 성과급을 받으면 연금에 추가 적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4년 전 방 3개짜리 집을 120만호주달러(약 12억4000만원)에 매입했다.

미니씨처럼 호주에선 투자·저축이 ‘슈퍼애뉴에이션’이란 퇴직연금 중심으로 이뤄진다. 슈퍼애뉴에이션 펀드를 운용하는 회사가 워낙 많아 개인들이 자유롭게 고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퇴직연금이 주식 등 고위험 상품에 50% 이상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행 타는 ‘연금 추가 납입’

[글로벌 재테크 리포트] 은퇴자금 51% 주식에 넣는 호주…'슈퍼 펀드' 가 최고 재테크
호주에선 만기가 1년을 넘는 정기예금이 외면받고 있다. 장기간 돈이 묶이는 걸 싫어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그나마 사람들이 많이 찾는 예금 상품은 3개월짜리다. 현재 금리는 연 4.4~4.5%다. 스리하 선더램 웨스트팩은행 프라이빗뱅킹(PB) 매니저는 “고객 입장에서 연 4~5% 이자를 받아도 세금을 내고 나면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라며 “이 때문에 자신이 가입한 퇴직연금 펀드에 추가로 납입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다”고 했다.

슈퍼애뉴에이션은 상근 및 비정규 근로자의 퇴직연금 가입을 의무화한 제도다. 근로자는 별도 부담이 없지만 기업이 직원 연봉의 9% 이상을 따로 적립한다. 개인들은 슈퍼 펀드를 스스로 선택하거나 회사에 일임할 수 있다. 병원 대학 공무원 등 직종별로 특화한 펀드들이 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수익률이 부진하면 자연스럽게 도태되는 구조다. 2001년 3720개에 달했던 슈퍼 펀드 수가 작년 336개로 90% 이상 줄어든 배경이다.

그렇다면 호주 사람들은 왜 추가 적립할 정도로 슈퍼애뉴에이션을 신뢰할까. 과거 수익률이 예금 금리보다 높다는 점이 입증된 게 큰 이유다. 슈퍼 펀드의 지난 10년간(2003~2012년) 수익률은 연평균 4.8%다. 2004년부터 4년간은 연 12~15%의 고수익을 거뒀다. 호주 슈퍼애뉴에이션협회(ASFA)의 고든 노블 이사는 “2008년 금융위기 때 마이너스 수익을 기록했지만 곧바로 연 10% 정도의 수익을 회복했다”며 “이를 계기로 안정성이 부각됐다”고 설명했다.

○주식에 51% 운용

슈퍼 펀드의 평균 수익률이 높은 것은 고위험 자산인 주식 비중이 높아서다. 호주 건전성감독청(APRA)이 지난달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슈퍼애뉴에이션 총자산 중 주식에 투자하는 비중은 51%다. 나머지는 채권 원자재 리츠(부동산투자신탁) 등이다. 한국의 퇴직연금이 주식에 40% 이상 투자할 수 없는 것과 달리 자산운용 대상에 제한이 없다.

슈퍼 펀드 운용사인 스테이트 슈퍼의 마크 오브라이언 이사는 “소비자들이 각 슈퍼 펀드의 수익률을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갈아탈 수 있기 때문에 피말리는 경쟁을 벌인다”며 “호주 운용사의 70% 이상은 이 퇴직연금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호주의 자산운용업은 슈퍼애뉴에이션 덕분에 아시아 1위, 세계 3위 규모로 커졌다.

또 다른 운용사인 퍼스트 스테이트 인베스트먼트의 대니 라담 대표는 “슈퍼애뉴에이션 자산이 호주 주식시장의 시가총액보다 커지면서 해외로 적극 눈을 돌리고 있다”며 “금융위기 이후엔 대체투자 등 글로벌 자산 배분을 중시하는 전략을 쓴다”고 소개했다.

개인투자자 입장에선 슈퍼 펀드의 장점이 많다. 가장 큰 혜택은 연금 수령액에 대한 비과세다. 소득세가 30~40%에 이르는 이곳에선 엄청난 이점이란 설명이다. 다만 55세 이전에 슈퍼 펀드에서 돈을 빼면 수익금의 21%를 과징금으로 내야 한다.

○해외펀드·인프라채권펀드도 관심


호주 사람들이 많이 투자하는 금융상품은 슈퍼 펀드 말고도 여럿 있다. 요즘 인기를 모으는 게 해외주식형 펀드다. 현지 투자전문지인 인베스트먼트 매거진의 에이멀 어워드 기자는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인 연 2.75%까지 낮춘 이후 젊은 직장인들이 미국이나 아시아 등의 해외 펀드를 선호하고 있다”고 전했다.

개인들의 주식 직접투자는 많지 않다. 호주 증권거래소(ASX) 관계자는 “간접투자가 활성화되면서 뉴욕이나 도쿄같이 개방된 트레이딩 공간을 없앴다”고 말했다.

사이먼 라 그레카 AMP캐피털 인프라투자 담당임원은 “도로 항만 등 사회간접자본에 주로 투자하는 인프라 채권펀드의 경우 기본금리에다 연 5~7%의 추가 수익을 내는 게 가능하다”며 “이 상품에 대한 문의가 크게 늘었다”고 설명했다.

시드니=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

■ 슈퍼애뉴에이션

superannuation. 호주 정부가 1992년 도입한 퇴직연금 제도. 총자산은 현재 1조5800억호주달러(약 1625조원) 규모다. 매달 450호주달러 이상 소득이 있으면 의무가입 대상이다.

현재 부담률은 연봉의 9.25%인데, 단계적으로 12%까지 높아진다.

■ 글 싣는 순서

① 대체투자·월지급식 눈돌린 美·日
② 홍콩은 지금 채권형 펀드 ‘붐’
③ 주식투자형 연금의 나라 호주
④ 중위험·중수익 열풍 부는 독일
⑤ ‘우리는 어떻게’… 전문가 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