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김홍열 경제부 차장
사회=김홍열 경제부 차장
“언제든지 공급이 가능하고 깨끗하면서 안전하며 값까지 싼 에너지는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에너지를 선택하는 데 어떤 가치를 우선할 것인지 국민이 선택해야 합니다. 정부도 모든 걸 충족해 줄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국민을 설득해야 합니다.”

한국경제신문이 전력대란을 타개하기 위해 21일 서울 중림동 본사에서 연 좌담회에서 전문가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2011년 ‘9·15 순환단전 사태’는 에너지가 국민의 삶에 얼마나 밀접한지 직접 깨닫게 한 사건이었다. 이후 전기요금 인상, 원자력발전소 건설 논란, 밀양 송전탑 사태 등에서 보듯 에너지 문제는 그야말로 끓어오르는 ‘갈등의 용광로’다. 에너지 문제의 해법을 모색한 이번 좌담회에는 전력산업연구회 회원인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 손양훈 인천대 교수, 김영산 한양대 교수, 조성봉 숭실대 교수가 참석했다. 사회는 김홍열 한국경제신문 경제부 차장이 맡았다.

에너지 전문가들은 “완벽한 에너지는 없다”며 “에너지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데 어떤 가치를 우선할 것인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 김영산 한양대 교수, 조성봉 숭실대 교수,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 손양훈 인천대 교수.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에너지 전문가들은 “완벽한 에너지는 없다”며 “에너지 정책 방향을 결정하는 데 어떤 가치를 우선할 것인지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왼쪽부터 김영산 한양대 교수, 조성봉 숭실대 교수,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 손양훈 인천대 교수. 강은구 기자 egkang@hankyung.com

[전력대란 누가 키웠나] "언제든지 공급되고 안전하며 값도 싼 에너지는 없다"
▷사회
=최근 몇 년 새 전력난으로 국민이 고통받고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조성봉 숭실대 교수=전기요금이 너무 안 올랐다. 전기를 생산하는 데 쓰이는 석유 가스 등의 가격은 올랐는데 전기는 그렇지 못했다. 전력수요 예측이 실패했다고 하지만 전기요금이 싸니까 예측이 무의미해진 것이다. 전형적인 에너지 정책의 실패다.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수요예측을 할 때 전기요금이 이렇게 낮게 유지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국내총생산(GDP) 증가 추이를 예상하면서 전력수요 예측을 한다. 경제가 성장하면 전기수요가 늘어나고, 수요가 늘어나면 전기요금도 오르는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 값이 싸니 가정 기업 모두 전기로 몰리는 것이다.

▷손양훈 인천대 교수
=과거에도 전기요금을 못 올렸는데 전력난이 심하지 않았던 것은 석유 가스 등 다른 에너지 가격이 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10년 전 수요를 예측했으면 거기에 맞게 전기요금과 전기 사용 패턴이 변할 수 있는 정책이 따라줘야 하는데 안 그랬다.

▷사회=정치권이나 국민 여론도 변수 아닌가.

▷김영산 한양대 교수=그렇기 때문에 전기요금 책정 원칙을 정해서 지켜야 한다. 지금처럼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정하다 보면 못 올린다. 전기요금은 한국전력에서 필요하다 싶으면 이사회를 열어 올리는 게 원칙이다. 정부는 물가에 민감하고 정치권도 한마디씩 거든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전기요금을 조정하기 힘들다.

▷조 교수=물가 안정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공요금 산정 원칙이 있다. 공공요금은 적정원가와 적정투자보수의 합인 총괄원가 수준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을 지키며 인상했다면 산업계와 국민에게 평소 신호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할 수 있는 공정한 원칙을 만들고 동의하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지금처럼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에 전기위원회를 두고 있는 것과 달리) 전기요금을 산정하는 독립위원회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김 교수=장기적인 수요를 예측하는 데도 민간이 폭넓게 참여해야 한다. 지금은 정부 주도로 교수, 연구원이 민간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기업, 소비자 등 전기를 직접 소비하는 주체도 수요예측 과정에 참여시키는 걸 고려해야 한다.

▷사회=에너지 소비자들이 값싼 전기로 쏠리는 현상을 해소하는 한편 전력 공급을 늘리는 것도 필요할 텐데. 그러려면 원자력발전소도 더 지어야 할 테고.

▷조 교수
=원전의 안전 문제를 인정하지만 원전 비중 자체를 급격히 줄일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한국은 에너지 분야에서 ‘고립된 섬’과 같다. 독일이 원전을 줄인다고 했으나 전기가 부족하면 이웃한 프랑스에서 전기를 수입하면 된다.

▷손 교수
=원전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눈이 달라졌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전을 강화하는 데는 비용이 올라간다. 국민들이 비용을 감수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사회=잇따라 터져나오는 원전 비리도 원전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있다.

▷조 교수=원전 산업의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야 한다. 한국전력과 자회사인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전 운영업체지만 건설업체의 역할을 더 해왔다. 외국을 보면 미국 GE, 일본 도시바와 히타치, 프랑스 아레바 등 원자로 제작업체가 국내외 원전 건설 입찰에 참여한다. 한국은 운영업체인 한전이나 한수원이 참여한다. 마치 비행기 팔러 나갈 때 대한항공이 나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다 보니 원전 건설·제작 쪽에서는 한전과 한수원이 ‘슈퍼갑’이다. 납품업체 시험기관 등 모든 하청업체가 한전과 한수원에 잘 보일 수밖에 없다.

▷사회=원전이 불신을 받고 있어 신재생에너지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여전히 높다.

▷이 교수=신재생에너지는 소비자들이 필요할 때가 아니라 발전이 가능할 때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 태양광 발전에 의존하다가 날이 흐리면 전기를 못 쓴다. 풍력발전 비중이 50%가 넘는 덴마크는 바람이 안 불 때면 인근 국가에서 전기를 사올 수 있다. 한국은 어떤가.

▷손 교수=신재생에너지가 발전한 독일이나 네덜란드는 급성장하는 경제가 아니다. 따라서 이들 나라는 전력수요가 안 늘어난 지 오래됐다. 설비도 남아돌아 전력 예비율이 40%에 달한다. 평소에 신재생에너지 설비를 놀려도 될 정도다.

▷사회=밀양 송전탑 사태와 같은 송전 문제도 갈등의 요인이 되고 있다.

▷조 교수=수도권에 인구 2000만명 이상이 산다. 생산되는 전기의 40% 이상을 수도권에서 쓰고 있다. 그런데도 환경규제 탓에 원전이나 석탄화력발전소는 수도권에 못 짓는다. 발전소는 인천 영흥도에 있을 뿐이다. 이곳은 전체 전력 생산의 25%밖에 담당하지 않는다. 결국 남부지방에서 송전을 해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지역 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회=최근의 갈등이 전력산업 구조개편의 결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교수
=전력산업구조 개편은 김대중 정부 때 시작해(발전부문) 2004년 노무현 정부 때 제동이 걸렸다(배전부문). 그 사이 전력산업 규모는 두 배 이상 성장했다. 한전의 부채는 현재 50조원에 이른다. 오히려 경쟁 체제를 도입했다면 전기가 모자랄 때 시장에서 가격이 높게 형성되고, 남으면 가격이 떨어져 전력 부족 사태에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10년 전 전력산업 구조개편을 중단시킨 조치가 현재 전력 부족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김 교수=아기가 태어나면 기어다니게 하고, 걸음마 하기 시작하면 뛰어다닐 수 있어야 한다. 전력 산업도 마찬가지다. 기술이 발전하면 시장이 서야 한다. 구조개편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아기가 넘어질 수도 있는데 왜 걸음마 시키느냐는 것과 같다. 결국 20세 청년을 유모차에 계속 태우고 다니는 격이다. 그러니 유모차가 부서지고 바퀴가 고장날 수밖에 없다. ‘민영화는 곧 대기업에 특혜 주기나 요금 폭등’이라는 인식이 국민에게 뿌리 깊은 것 같다.

▷조 교수
=통신, 인터넷 등 정보기술(IT) 산업도 민영화에 성공하지 않았나. 소비자들이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을지 상상해 봐라. 맞벌이 부부는 집에 있는 시간이 적으니 기본요금이 싸고, 사용요금이 비싼 요금제가 좋을 거다. 24시간 편의점은 기본요금은 비싸고 사용요금이 싼 게 좋을 것이다. 이처럼 소비자의 선택권이 늘어나는 측면에서 생각하는 게 필요하다.

▷김 교수=국민들에게 막연한 저항과 공포가 있는 게 분명하다. 싸게 쓸 수 있는데 바꿀 이유가 뭐냐는 주장도 있을 수 있다. 전력산업이 민영화가 안 되다 보니 전기요금이 정책수단으로 전락했다. 원가 이하로 전기가 공급돼 전력 수요가 많으면 많을수록 혜택이 되는 구조다. 그러나 전기를 쓴 만큼 제값을 내야 한다. 물론 저소득층을 위한 에너지 복지 정책은 별도로 펴야 한다.

▷사회=가스공사가 독점하고 있는 액화천연가스(LNG) 도입을 자유화하려고 해도 저항이 거세다.

▷이 교수=한국은 LNG 발전이 가장 비싸다. 가스공사가 LNG 수입을 독점하면서 발전용 가스를 비싼 값에 공급하기 때문이다. 일본은 LNG를 값이 싼 기저부하 발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앞으로 셰일가스 혁명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단하기 어렵지만 한국이 지금과 같은 구조로는 대응하기 힘들다.

▷조 교수=LNG 발전은 상대적으로 깨끗해 수도권에 쉽게 지을 수 있다. 단기적으로 송전 갈등이나 원전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있다. 다만 독점적으로 LNG 도입이 이뤄지다 보니 값이 비싸다. 따라서 가스의 자유로운 수입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앞으로 정부는 에너지 정책을 어떻게 펼쳐야 하나.

▷손 교수=전기는 국민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매년 전기가 부족한 상황이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국민들은 안전하고 온실가스는 적게 나와야 하며, 언제든지 공급되면서 싼 전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 집 앞에 전력시설을 건설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한다. 이처럼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에너지는 지금으로선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정부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국민에게 얘기해야 한다.

▷이 교수=전력 수요가 많은 8월에는 순환단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주무부처인 산업부는 올여름 전기요금 인상이 없다고 공언했다. 쓴소리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요금 인상이 없으면 여름이나 겨울마다 전력수급 비상상황을 감내해야 한다.

정리=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