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에너지 백년대계'
日지진·부품비리로 여론 몰리자 원전 신규건설 등 결정 미뤄
일관된 정책이 중요
정부가 불신 자초하면 안돼…공급 안정성 등 원칙 지켜야
“원전 신규 건설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겠다.”(2013년 제6차 전력수급기본계획)
에너지 백년대계를 세워도 시원찮을 판에 정부는 이처럼 불과 5년 만에 원전 정책 궤도를 수정했다. 원칙 없는 정부의 에너지 정책이 전력대란을 더욱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은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97%에 달해 어느 나라보다 과학적인 예측과 판단에 바탕을 둔 일관적인 에너지 정책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정치권의 목소리나 지역 민원에 흔들릴수록 원전을 비롯한 에너지 정책은 불신을 사게 된다는 것이다. 한 전문가는 “외부 압박에 일일이 대응하다 보니 에너지 정책이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원전이 핵심 에너지라더니…
무원칙한 에너지 정책의 대표적인 사례가 우왕좌왕하는 원자력 정책이다. 정부는 3년 전만 해도 원자력을 신재생에너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친환경 전원’이라고 발표했다. 공급 능력이 뛰어난데다 화력발전 연료인 석탄에 비해 환경오염이 적고, 천연가스보다는 발전단가가 세 배 이상 싸기 때문이다.
2030년까지 국가의 에너지원별 비중과 관련 정책을 담은 제1차 국가에너지기본계획에도 ‘원자력은 공급 안정성이 높고 경제적이면서, 온실가스 배출도 거의 없어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위한 핵심 수단’이라고 명시했다. 2006년 26%인 원전 설비 비중을 2030년까지 41%까지 대폭 확대하겠다는 의지도 분명히 했다.
정부의 원전 정책 의지가 약해진 것은 2011년 3월 지진으로 일본 후쿠시마현에 위치한 원전의 방사능 누출사고가 터지면서다. 여기에다 국내 유일의 원전 사업체인 한국수력원자력 직원들의 잇따른 비리와 원전 불량 부품 납품 비리가 드러나면서 여론이 악화됐다.
이런 이유로 정부는 지난 2월 제6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내놓으면서 “원전에 대한 국민 수용성을 감안해야 한다”고 물러났다. “제2차 에너지기본계획을 확정할 때까지 원전의 신규 건설 여부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애초 목표로 한 중·장기 에너지 믹스(전원별 비중)를 큰 폭으로 수정했다. 2010년 제5차 전력수급 기본계획에 따르면 정부는 전체 발전량에서 원자력 비중을 2020년까지 44.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반면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석탄 발전 비중 목표는 36.9%로 정했다. 하지만 3년만에 나온 제6차 기본계획에서는 2020년 원자력 비중 목표를 33.8%로 10.2%포인트나 낮춰 잡았다. 반면 석탄은 42.8%로 5.9%포인트 높게 설정했다.
◆정부가 기본 원칙 세워야
이 같은 정부의 태도가 합리적 판단이 아닌 인기영합주의적 선택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원전의 안전을 강화하고 비리를 없애는 조치와 원전 가동 여부에 대한 판단은 구분돼야 한다는 것.
후쿠시마 사태를 직접 경험한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가 원전 반대 여론에도 최근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전문적 판단에 따라 안전이 확인된 원전은 재가동할 것”이라고 강한 소신을 밝힌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김규태 동국대 원자력 및 에너지공학부 교수는 “원전업계 병폐를 근절하는 건 반드시 필요하지만 정부가 원전 정책에 대해 갈팡질팡하면서 불필요한 불신을 부추기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정부가 단기적인 대응에서 벗어나 에너지 정책의 원칙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에너지 이슈는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기 때문에 정부가 중심을 잡지 못하면 엄청난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이 같은 비용은 즉시 드러나지는 않지만 미래 세대가 감당할 몫이 된다는 걸 염두에 둬야 한다는 얘기다.
국가에너지전문위원으로 활동한 조성경 명지대 교수는 “에너지 이슈는 공급 안정성, 경제성, 환경성, 사회적 수용성 등 기본원칙을 바로 세우는 게 중요하다”며 “국민을 설득하는 것도 정부가 명확한 원칙을 가질 때 가능하다”고 말했다.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