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니 창조산업이니 하는 말들이 이어진다. 이제 창조라는 말만 들어도 낯간지러워진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창의성과 뭐가 다르냐는 얘기도 나온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창조가 맞는 말이다. 영어 ‘creative’는 ‘창의적’, ‘creation’은 ‘창조’, ‘creativity’는 ‘창의성’으로 번역하지만, 어근인 ‘creo’가 ‘만들다’는 뜻이니, 창의성보다는 창조성이 자연스럽다. 왜 창의성이라고 하게 됐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일본어 번역을 직수입했다는 느낌이다.

창조성이란 특정 사회 맥락에서 새롭고 유용한 것을 만든다는 의미다. 그래서 상상력, 차별적 아이디어만 강조하면 안 된다. 뭔가 유용한 것을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여야 창조적이다.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아이디어와 함께 만드는 방법 또는 생산수단도 필요하다. 우리는 생산수단을 기술이나 엔지니어링이라 부르고, 정보기술(IT)에서는 프로그래밍이라고 한다. 공과대학은 이런 생산수단을 교육하는 곳이고, 그 출신을 엔지니어라고 부른다. 아이디어가 중요해도 만들지 못하면 소용없기 때문에 생산수단을 중요시하고 엔지니어를 대우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원천기술도 이런 것이다.

그런데 창조경제에 다른 변화가 나타났다. 지식경제는 아는 게 힘이며, 한 명의 전문가가 수천, 수만 명을 먹여살린다. 일반의보다 전문의가 진료비를 더 받듯이, 고학력자와 전문가를 우대하고, 전문인력을 양성한다. 그런데 창조시대를 이끄는 인력은 흥미롭게도 정통 공학도도 아니고, 전문가이기는커녕 대학 졸업장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 황당하고 신기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이 바로 창조경제론이다. 예를 들어보자. 아이폰을 누가 만들었는가 물으면, 스티브 잡스라고 말하는 이가 적지 않다. 참 재미있는 답이다. 알려진 대로 잡스는 대학을 몇 개월 다니지 않았고 공학도도 아니며, 인문학과 디자인, 소프트웨어에 심취해 있던 사람이다. 그의 애플은 공장 하나 없으며 UI·UX(사용자환경·사용자경험)와 마케팅을 한다. 페이스북의 저커버그도 대학을 중퇴했고 전산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얼마 전 17세 고등학생이 만든 섬리라는 앱을 야후에서 인수했다. 이 학생은 과연 천재였을까. 작년 4월 인스타그램이란 사진 공유 앱을 페이스북에서 인수했다. 이 앱을 만든 케빈 시스트롬도 전형적인 인문학도였다. 그는 졸업 후에 HTML(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을 공부했고 프로그래밍도 야학으로 터득했다고 한다. 그가 만든 이 앱은 실리콘밸리 역사상 가장 큰 인수합병이었고, 금액은 1조원이 넘었다. 현대자동차 주가총액이 약 42조원, LG전자가 15조원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외국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게임으로 추앙받던 애니팡이나 드래곤 플라이트도 마찬가지이다.

삼성과 애플의 특허소송은 이런 가치관과 경제가치의 변화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엄지와 검지를 쥐락펴락하며 사진을 축소·확대하는 핀치 UI나 휴대폰 모서리의 둥그런 디자인 같은 것은 우리에겐 원천기술도 아니고 심지어 무시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것이 특허의 대상이고 조단위의 천문학적 특허료가 계산됐다.

이런 거대한 변화의 원천은 인지과학, HCI(인간-컴퓨터 상호작용), UX, 인공지능, 인간공학, 디자인 등 인간중심적 관점에서 기술을 바라보는 융합이다. 이들은 인문사회적 관점으로 생산수단을 바라보고 활용할 줄 아는 인력이다. 이 때문에 NHN이 1000억원을 들여 인문사회, 디자인, UX 인력에게 소프트웨어 교육을 하는 것이고, 삼성의 SCSA(컨버전스 SW 아카데미) 프로그램도 이런 취지다. 이 때문에 인간중심의 융합이 바로 우리 과학기술산업의 미래를 위한 창조 플랫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려 16조원이 넘는 국가연구개발비에서 차지하는 인문사회 중심의 융복합 부문은 얼마나 될까. 40억원도 안 된다.

문화융복합까지 포함해도 300억원이다. 창조경제의 그림은 멋지지만, 우리의 현실은 이상보다 멀다.

조광수 성균관대 교수, 인터랙션사이언스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