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처음 만난 여성에게 호감을 느꼈다면 제1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그 여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강렬한 느낌이 들었다면 제2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그 여인이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되면 제3지점에 당도한 것이다. 그리고 쟁취하고 싶은 여인의 아름다움과 장점을 과대평가하며 희열감을 느끼게 되면 4단계에 진입한 것이다. 당신이 어떤 여인의 찬미자가 됐다면 당신은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19세기 전반의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1783~1842, 본명 앙리 베일)은 사랑의 탄생 과정을 4단계로 구분했다. 그는 사랑을 볼로냐에서 로마로의 여행에 비유하여 출발 지점인 볼로냐를 무관심, 도착 지점인 로마를 사랑의 완성으로 봤다. 그가 크리스탈리자시옹(‘결정화’라는 뜻)이라 이름 붙인 ‘사랑의 탄생’은 두 도시의 딱 중간 지점에 해당한다. 로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난관을 헤쳐야만 한다.

그가 사랑에 집착한 것은 불우한 집안 환경 때문이었다.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곱 살에 어머니가 세상을 뜬 탓에 허위의식으로 똘똘 뭉친 아버지와 광적인 가톨릭 신자인 숙모, 가정교사로 들어온 사제의 강압적인 훈육 속에서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자랐다.

오랜 애정결핍은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갈구로 이어졌고 그가 평생 사랑의 릴레이를 펼친 배경이 됐다. 1799년 11월 스탕달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파리로 갔지만 마음을 바꿔 극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극장을 드나들었다. 1800년 친척의 주선으로 나폴레옹 군에 입대한 그는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의 사랑의 역사가 시작된 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상관의 정부인 안젤라와의 불같은 사랑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애정전선에 뛰어든다. 그러나 그는 아직 수줍음 많은 사랑의 초보자였다. 1802년 파리로 돌아간 그는 친구의 여동생 빅토린, 여배우 멜라니 길베르와 잇달아 사랑에 빠졌고 1806년 독일 브룬스비크에 전속된 뒤에는 걸신들린 사람처럼 독일 여인들을 탐했다.

1810년 영사 감사관에 임명된 스탕달은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혀 온 가난의 멍에에서 벗어난다. 이제 사회적 지위까지 얻은 터라 그의 애정생활에도 거칠 게 없었다. 1811년 초 오페라 가수 안젤리나에 잠시 눈이 멀었던 그는 같은 해 5월 오랫동안 연모해 온 피에르 다루 장군의 부인 알렉상드린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가 거절당한다.

1811년 밀라노로 옮긴 그는 그곳에서 옛 연인 안젤라와 재회하지만 사랑의 완성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는 그곳에 오래 머물렀지만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쟁에서 패하면서 모든 걸 잃게 된다. 공직에서 물러난 그는 이후 정치평론 등 글쓰기를 호구로 삼는다.

1817년 스탕달은 남편과 사별한 여동생 폴린을 위로하기 위해 함께 밀라노로 여행을 떠났다. 그는 그곳에서 평생 잊지 못할 한 여인을 만난다. 이듬해 친구 주세페 비스마라가 나폴레옹 휘하 장군의 부인인 마틸데 비스콘티 뎀보우스키(1773~1823)를 소개해 준 것이다. 마틸데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얼어붙고 말았다. 연애의 고수로 자처하던 그였지만 마틸데 앞에서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그는 편지로 사랑을 고백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는 수줍음을 감출 수 없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알아차릴 수 있을 겁니다.”

마틸데는 그런 스탕달을 처음에는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조카로부터 그가 바람둥이라는 언질을 받은 뒤 거리감을 두기 시작했다. 스탕달은 마틸데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열과 성을 다했지만 식어버린 그의 마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상심과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마틸데를 너무나 갈구한 나머지 1819년 그가 두 아들을 만나러 볼테라에 갈 때 변장한 채 따라나섰다. 불행하게도 스탕달은 도중에 발각됐고 두 사람의 얼굴에는 수치심과 모욕감이 교차했다. 스탕달은 수많은 편지를 보내 용서를 구했지만 부인은 그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상심에 젖은 스탕달은 그해 12월 자신의 사랑을 되돌아보며 ‘연애론’을 집필한다. 그동안의 사랑의 궤적을 되돌아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연애란 무엇인가에 대해 심리학적, 과학적 기술을 시도한 것이다. 그것은 미완으로 끝난 자신의 사랑을 기념함과 동시에 새로 사랑의 문턱에 선 사람들이 사랑의 완성을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스탕달은 오늘날 ‘적과 흑’ ‘팔므의 수도원’ 등으로 발자크와 함께 19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문호로 추앙된다. 그러나 생존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B급 작가에 불과했다. 단 100명만 자신의 글을 읽어주면 만족한다던 그였다. 그렇게 그는 누가 알아주는 삶이 아닌 자신이 원했던 삶을 산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몽마르트르 묘지의 비문에 쓰인 단 세 개의 단어가 오로지 사랑과 문학을 먹고 살았던 한 남자의 진솔한 삶을 압축적으로 얘기해준다. “썼노라. 사랑했노라. 살았노라.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