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최재호 무학회장 "일기당천 특전사 정신으로 전국구 회사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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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 초 새 사업 제안 거절 당해…"하고 싶은 일 하겠다"며 사표
계열사 분규 '해결사'로 복직…"답은 현장에 있다"는 사실 체험
울산發 불매운동 '불똥' 극복…'좋은데이'로 부산시장 휩쓸어
최근 19년만에 대표이사직 떼고 2015년 수도권 공략 채비에 몰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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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19년만에 대표이사직 떼고 2015년 수도권 공략 채비에 몰두
“대표이사는 왜 그만둔 거냐. 나도 아직 살아 있는데….”
지난 3월19일 아침, 최위승 무학 명예회장(80)은 둘째 아들인 최재호 회장(53)이 자신이 세운 회사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아들은 ‘쿨’하게 대답했다. “대표를 너무 오래 해서요.” 1988년 기획실장으로 아버지 회사에 입사한 최 회장은 1994년에 대표이사가 됐다. 대표이사가 된 지 19년 만에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제는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했으니 나는 한발짝 물러서 보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라는 점을 잘 설명드렸다”며 “아버지도 ‘한다면 하는’ 내 성격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설명을 듣고는 별 말씀 없으셨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회장’ 직함을 유지한 채 이사회 의장을 맡으며 대규모 투자 등 회사의 굵직한 결정은 직접 내릴 계획”이라며 “그게 창업자이신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난 2일 서울 잠원동 ‘파머스 키친’에서 만난 최재호 무학 회장은 네 시간 동안 거침없이 인생 이야기를 풀어냈다. 학군단(ROTC) 20기로 특전사에서 근무한 군 시절부터 대표 타이틀을 뗀 이후 전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한마디로 ‘좌충우돌 인생’이라고 할 만했다.
○“하고 싶은 일은 한다”
파머스 키친은 경남 창원에 본사가 있는 무학이 서울 사무소 건물 1, 2층에 서울 소비자의 ‘입맛’을 파악하기 위한 ‘테스트 마켓’으로 운영하고 있는 음식점이다. 최 회장은 지인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이 식당을 찾는다.
1988년 일본 도카이(東海)대에서 석사를 마친 뒤 무학에 입사한 그는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튀는’ 행보를 보였다. “기획실장으로 입사해서 보니까 소주만 팔아서는 먹고살기 힘들겠더군요. 영업이익이 1년에 3억~5억원에 불과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서 다른 업종으로 진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명예회장님께 세 가지 새 사업안을 보고했습니다.”
그때 그가 새로 해 볼 만한 사업으로 꼽은 게 편의점, 택배, 우롱차 사업이었다. 그러나 최 명예회장은 아들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생소한 사업들이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새 사업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외부에서 데려온 우수한 사원들도 조건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입사시키는 데 난색을 표하시는데 실망했다”며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1989년에 곧바로 사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회사 경영에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게 된 데에는 1989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자동 포장기계 회사 신명공업의 파업이 큰 영향을 미쳤다. 최 명예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던 이 회사는 당시 심각한 노사분규를 겪고 있었다. 최 명예회장은 놀고 있던 최 회장을 불러들여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처음엔 마뜩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너무 마음고생을 하시는 것 같아 도와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공업교과서를 가져다 놓고 처음부터 새로 공부했죠. 선반이 어떻고, 밀링이 뭐고, 제어값은 어떻게 구하고…. 이런 내용들을 알아야 직원들하고 얘기가 통하거든요.” 그는 현장에서 직원들과 부딪쳐가며 애로사항을 하나둘 해결해 줬다. 그러면서 “이 회사는 당신들 것”이라며 주인의식도 심어줬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체질상 술을 전혀 못했던 그였지만, 노조원들과 편하게 얘기하기 위해 악으로 버티며 술을 마셨다.
○잊을 수 없는 ‘썰물작전’
사회 초년병 시절 얘기가 한 시간가량 이어질 무렵, 주문해 둔 서양 정식 메뉴가 나오기 시작했다. 무학이 수입하는 이탈리아산 ‘일 바치알레 몬페라토 로소’ 와인이 곁들여졌다. “입사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최 회장은 “1996년 울산의 광역시 승격 여부를 놓고 불거진 정치권의 갈등으로 엉뚱하게 무학의 점유율이 급락했을 때 이를 단숨에 회복시킨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울산시민들이 경남의 대표적인 3개 회사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였습니다. 경남은행과 무학, 마산의 몽고식품이 대상으로 지목됐어요.” 당시 울산에서 65%에 달하던 시장 점유율은 불매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30%대로 추락했다. 최 회장은 떨어진 울산지역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만 본사가 있는 창원에 남겨두고, 나머지 직원을 울산에 집결시켰다. 이후 1년간 울산지역 점유율 회복에 ‘올인’했다. 이 당시 펼쳤던 영업전을 그는 ‘썰물작전’이라고 불렀다.
“우리(무학)의 ‘안방’을 ‘밀물’처럼 치고 들어왔던 경쟁사를 ‘썰물’처럼 몰아내자는 의미로 그런 표현을 썼어요. 전 직원이 밤마다 업소를 찾아다니며 저인망식 마케팅을 펼친 것은 기본이고, 울산시 측에 ‘공장을 짓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썰물작전이 효과를 보면서 무학은 점유율을 점차 회복해나갔다. 2000년이 되자 울산지역의 무학 점유율은 75%까지 올라갔다.
○영업비용 요청에는 눈 감고 사인해
20년 이상 치열하게 회사를 이끌어왔지만, 5~10년 전까지만 해도 지방 소주회사의 사장이었을 뿐 전국적으로 알려지진 않았다. 그런 그를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준 게 2006년 나온 16.9도짜리 소주 ‘좋은데이’다. 최 회장이 ‘좋은데이’를 앞세워 대선주조가 장악하고 있던 부산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009년이다. “대선주조의 ‘C1’소주를 잡자”는 의미의 ‘C1프로젝트’를 6개월 이상 현장(부산)에서 진두지휘했다. 그해 무학의 부산 소주시장 점유율은 50%를 넘어섰다. 지금은 점유율이 70%까지 상승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ROTC 20기로 특전사(제13공수 특전여단)에서 군복무를 한 최 회장은 직원들에게 ‘한 명의 기병이 1000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특전사 정신을 수시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썰물작전, C1프로젝트와 같은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영업현장을 ‘전쟁터’로 생각하는 성향이 강하다. 소주영업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가 세운 제1 원칙은 ‘현장 제일주의’다.
“현장 목소리 우선 … 영업비 결재는 눈감고 OK”
“영업 관련 비용을 결재할 때 눈을 딱 감고 사인하는 버릇이 있어요. 다른 기업과 차별화를 하려면 ‘현장의 목소리를 경영하는 데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죠. 예를 들어 영업담당 직원들이 ‘주요 거래처인 대형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이 세탁용품을 지원해달라고 한다’며 판촉용 세제 구입비용을 올렸다고 생각해 봐요. 책상머리에 앉아서만 일하는 사람이라면 ‘소주회사에서 세제 구입 비용이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라고 생각하겠지만, 현장에서는 이런 게 절실한 요구이거든요.”
“눈을 감고 사인하는 게 여러 차례 반복되면 재무구조에 안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무차입 경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영업 이외 다른 비용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유지하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10년 이상 쌓아 왔어요.”
○서울·수도권을 향한 시선
이야기를 시작한 지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디저트가 나오고 영업시간 마감이 다 돼 갔지만, 그는 지치지도 않았다. 최 회장은 대표이사를 그만둔 뒤 ‘좋은데이사회공헌재단’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1주일에 한두 번 창원을 찾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서울 잠원동 집에 머물고 있다. “바쁘게 살다가 쉬니 심심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사람 만나러 다니느라 바쁘다”는 답이 돌아왔다.
최 회장은 지금부터 착실하게 준비해 2015년께는 본격적인 서울 및 수도권 시장 공략에 나설 생각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서울 및 수도권 시장을 잘 아는 인적자원이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지역정서에만 익숙한 직원들이 주축이 돼 올라오면 필패(必敗)하게 돼 있어요. 서울 및 수도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을 모시기 위해 지금부터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고 있죠.”
최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이유는 “지지 않는 싸움만 했기 때문”이다. “리더 개인의 욕심 때문에 준비 없이 서울·수도권에 진출했다가 직원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해 ‘지지 않는 싸움’을 하고 싶어요.”
최재호 회장의 단골집 파머스 키친 이탈리아 레스토랑 … 야외에 바비큐 테라스
‘파머스 키친’은 무학에서 직접 운영하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다. 무학이 예전부터 서울 사무소로 쓰던 건물 1층과 2층에 서울 소비자의 입맛을 파악하기 위한 테스트마켓으로 운영하고 있다. 최재호 회장이 ‘사랑의 밥차’ 활동을 후원하며 인연을 맺은 배우 정준호 씨 등 지인들과 함께 자주 식사하는 곳이다.
크림과 토마토 소스가 어우러진 꽃게로제크림파스타(1만9500원)와 달콤한 고르곤졸라피자(1만9000원)가 대표 메뉴다. 저녁에는 등심이나 생선요리와 함께 소꼬리파스타 등을 즐길 수 있는 디너A코스(4만8000원)가 마련돼 있다.
야외에는 바비큐 테라스를 운영하고 있다. 3만1900원을 내면 야외 잔디밭에서 등심 스테이크 등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5500원의 별도 요금이 붙는 주류음료 패키지에는 서울에서는 맛보기 힘든 무학 소주 ‘좋은데이’와 ‘화이트’ 등이 포함돼 있다.
1층에는 무학주류상사에서 수입하는 와인을 판매하는 무학주류마켓이 있다. (070)7576-2111
송종현/강진규 기자 scream@hankyung.com
지난 3월19일 아침, 최위승 무학 명예회장(80)은 둘째 아들인 최재호 회장(53)이 자신이 세운 회사의 대표 자리에서 물러났다는 소식을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깜짝 놀라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아들은 ‘쿨’하게 대답했다. “대표를 너무 오래 해서요.” 1988년 기획실장으로 아버지 회사에 입사한 최 회장은 1994년에 대표이사가 됐다. 대표이사가 된 지 19년 만에 스스로 물러난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제는 회사가 어느 정도 성장했으니 나는 한발짝 물러서 보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할 때’라는 점을 잘 설명드렸다”며 “아버지도 ‘한다면 하는’ 내 성격을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설명을 듣고는 별 말씀 없으셨다”고 말했다. 최 회장은 “‘회장’ 직함을 유지한 채 이사회 의장을 맡으며 대규모 투자 등 회사의 굵직한 결정은 직접 내릴 계획”이라며 “그게 창업자이신 아버지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인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난 2일 서울 잠원동 ‘파머스 키친’에서 만난 최재호 무학 회장은 네 시간 동안 거침없이 인생 이야기를 풀어냈다. 학군단(ROTC) 20기로 특전사에서 근무한 군 시절부터 대표 타이틀을 뗀 이후 전국을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한마디로 ‘좌충우돌 인생’이라고 할 만했다.
○“하고 싶은 일은 한다”
파머스 키친은 경남 창원에 본사가 있는 무학이 서울 사무소 건물 1, 2층에 서울 소비자의 ‘입맛’을 파악하기 위한 ‘테스트 마켓’으로 운영하고 있는 음식점이다. 최 회장은 지인들과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이 식당을 찾는다.
1988년 일본 도카이(東海)대에서 석사를 마친 뒤 무학에 입사한 그는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튀는’ 행보를 보였다. “기획실장으로 입사해서 보니까 소주만 팔아서는 먹고살기 힘들겠더군요. 영업이익이 1년에 3억~5억원에 불과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래서 다른 업종으로 진출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명예회장님께 세 가지 새 사업안을 보고했습니다.”
그때 그가 새로 해 볼 만한 사업으로 꼽은 게 편의점, 택배, 우롱차 사업이었다. 그러나 최 명예회장은 아들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는 생소한 사업들이었기 때문이다. 최 회장은 “새 사업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외부에서 데려온 우수한 사원들도 조건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입사시키는 데 난색을 표하시는데 실망했다”며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1989년에 곧바로 사표를 던졌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회사 경영에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게 된 데에는 1989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자동 포장기계 회사 신명공업의 파업이 큰 영향을 미쳤다. 최 명예회장이 최대주주로 있던 이 회사는 당시 심각한 노사분규를 겪고 있었다. 최 명예회장은 놀고 있던 최 회장을 불러들여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처음엔 마뜩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너무 마음고생을 하시는 것 같아 도와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공업교과서를 가져다 놓고 처음부터 새로 공부했죠. 선반이 어떻고, 밀링이 뭐고, 제어값은 어떻게 구하고…. 이런 내용들을 알아야 직원들하고 얘기가 통하거든요.” 그는 현장에서 직원들과 부딪쳐가며 애로사항을 하나둘 해결해 줬다. 그러면서 “이 회사는 당신들 것”이라며 주인의식도 심어줬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체질상 술을 전혀 못했던 그였지만, 노조원들과 편하게 얘기하기 위해 악으로 버티며 술을 마셨다.
○잊을 수 없는 ‘썰물작전’
사회 초년병 시절 얘기가 한 시간가량 이어질 무렵, 주문해 둔 서양 정식 메뉴가 나오기 시작했다. 무학이 수입하는 이탈리아산 ‘일 바치알레 몬페라토 로소’ 와인이 곁들여졌다. “입사 이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최 회장은 “1996년 울산의 광역시 승격 여부를 놓고 불거진 정치권의 갈등으로 엉뚱하게 무학의 점유율이 급락했을 때 이를 단숨에 회복시킨 것”이라고 대답했다.
“당시 울산시민들이 경남의 대표적인 3개 회사에 대해 불매운동을 벌였습니다. 경남은행과 무학, 마산의 몽고식품이 대상으로 지목됐어요.” 당시 울산에서 65%에 달하던 시장 점유율은 불매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30%대로 추락했다. 최 회장은 떨어진 울산지역 점유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최소한의 인원만 본사가 있는 창원에 남겨두고, 나머지 직원을 울산에 집결시켰다. 이후 1년간 울산지역 점유율 회복에 ‘올인’했다. 이 당시 펼쳤던 영업전을 그는 ‘썰물작전’이라고 불렀다.
“우리(무학)의 ‘안방’을 ‘밀물’처럼 치고 들어왔던 경쟁사를 ‘썰물’처럼 몰아내자는 의미로 그런 표현을 썼어요. 전 직원이 밤마다 업소를 찾아다니며 저인망식 마케팅을 펼친 것은 기본이고, 울산시 측에 ‘공장을 짓겠다’는 약속도 했습니다.” 썰물작전이 효과를 보면서 무학은 점유율을 점차 회복해나갔다. 2000년이 되자 울산지역의 무학 점유율은 75%까지 올라갔다.
○영업비용 요청에는 눈 감고 사인해
20년 이상 치열하게 회사를 이끌어왔지만, 5~10년 전까지만 해도 지방 소주회사의 사장이었을 뿐 전국적으로 알려지진 않았다. 그런 그를 ‘전국구 스타’로 만들어준 게 2006년 나온 16.9도짜리 소주 ‘좋은데이’다. 최 회장이 ‘좋은데이’를 앞세워 대선주조가 장악하고 있던 부산시장 공략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2009년이다. “대선주조의 ‘C1’소주를 잡자”는 의미의 ‘C1프로젝트’를 6개월 이상 현장(부산)에서 진두지휘했다. 그해 무학의 부산 소주시장 점유율은 50%를 넘어섰다. 지금은 점유율이 70%까지 상승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ROTC 20기로 특전사(제13공수 특전여단)에서 군복무를 한 최 회장은 직원들에게 ‘한 명의 기병이 1000명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의 특전사 정신을 수시로 강조하고 있다고 한다. 썰물작전, C1프로젝트와 같은 명칭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영업현장을 ‘전쟁터’로 생각하는 성향이 강하다. 소주영업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가 세운 제1 원칙은 ‘현장 제일주의’다.
“현장 목소리 우선 … 영업비 결재는 눈감고 OK”
“영업 관련 비용을 결재할 때 눈을 딱 감고 사인하는 버릇이 있어요. 다른 기업과 차별화를 하려면 ‘현장의 목소리를 경영하는 데 그대로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죠. 예를 들어 영업담당 직원들이 ‘주요 거래처인 대형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들이 세탁용품을 지원해달라고 한다’며 판촉용 세제 구입비용을 올렸다고 생각해 봐요. 책상머리에 앉아서만 일하는 사람이라면 ‘소주회사에서 세제 구입 비용이라니….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라고 생각하겠지만, 현장에서는 이런 게 절실한 요구이거든요.”
“눈을 감고 사인하는 게 여러 차례 반복되면 재무구조에 안 좋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2001년부터 지금까지 무차입 경영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영업 이외 다른 비용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재무구조를 건실하게 유지하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10년 이상 쌓아 왔어요.”
○서울·수도권을 향한 시선
이야기를 시작한 지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디저트가 나오고 영업시간 마감이 다 돼 갔지만, 그는 지치지도 않았다. 최 회장은 대표이사를 그만둔 뒤 ‘좋은데이사회공헌재단’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1주일에 한두 번 창원을 찾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서울 잠원동 집에 머물고 있다. “바쁘게 살다가 쉬니 심심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사람 만나러 다니느라 바쁘다”는 답이 돌아왔다.
최 회장은 지금부터 착실하게 준비해 2015년께는 본격적인 서울 및 수도권 시장 공략에 나설 생각을 갖고 있다. 이를 위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서울 및 수도권 시장을 잘 아는 인적자원이다. “부·울·경(부산·울산·경남) 지역정서에만 익숙한 직원들이 주축이 돼 올라오면 필패(必敗)하게 돼 있어요. 서울 및 수도권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을 모시기 위해 지금부터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고 있죠.”
최 회장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이순신 장군이다. 이유는 “지지 않는 싸움만 했기 때문”이다. “리더 개인의 욕심 때문에 준비 없이 서울·수도권에 진출했다가 직원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해 ‘지지 않는 싸움’을 하고 싶어요.”
최재호 회장의 단골집 파머스 키친 이탈리아 레스토랑 … 야외에 바비큐 테라스
‘파머스 키친’은 무학에서 직접 운영하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이다. 무학이 예전부터 서울 사무소로 쓰던 건물 1층과 2층에 서울 소비자의 입맛을 파악하기 위한 테스트마켓으로 운영하고 있다. 최재호 회장이 ‘사랑의 밥차’ 활동을 후원하며 인연을 맺은 배우 정준호 씨 등 지인들과 함께 자주 식사하는 곳이다.
크림과 토마토 소스가 어우러진 꽃게로제크림파스타(1만9500원)와 달콤한 고르곤졸라피자(1만9000원)가 대표 메뉴다. 저녁에는 등심이나 생선요리와 함께 소꼬리파스타 등을 즐길 수 있는 디너A코스(4만8000원)가 마련돼 있다.
야외에는 바비큐 테라스를 운영하고 있다. 3만1900원을 내면 야외 잔디밭에서 등심 스테이크 등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 5500원의 별도 요금이 붙는 주류음료 패키지에는 서울에서는 맛보기 힘든 무학 소주 ‘좋은데이’와 ‘화이트’ 등이 포함돼 있다.
1층에는 무학주류상사에서 수입하는 와인을 판매하는 무학주류마켓이 있다. (070)7576-2111
송종현/강진규 기자 scre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