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적 양심·외길 지켜온 김두환씨(북경이공대학교(BIT) 법과대학 겸임교수)









윤희락기자(2mass@skyedaily.com)



기사입력 2013-04-07 23:58:03





























▲ 김두환 교수(북경이공대학교(BIT) 법과대학) ⓒ스카이데일리
60여 년간 외길 법학자로 지내온 김두환(79) 북경이공대학교(BIT) 법과대학 교수의 이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현재도 김 교수는 여든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해외를 넘나들며 상사법·항공우주법 관련 강의를 활발히 하고 있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대단한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 교수는 지난 1953년 법학자의 꿈을 갖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해 상사법을 전공했다. 이후 더 많은 법학 연구를 위해 서울대 대학원 법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김 교수는 한국상사법연구회 창립자인 고(故) 서돈각 서울대 교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면서 영미법사전을 편집하거나 일본어 상법논문을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석사과정이 끝날 무렵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가고자 했다. 하지만 이대측은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여대 특성상 기혼 남성만이 교수로 입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나이 26세로 당시로는 결혼 적령기였지만 학업에 몰두하다 보니 결혼할 틈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결국 다른 대학 교수직을 알아봤지만 교수직 취업의 문턱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아 그는 취업을 빨리 알아봐야 했다.









“프린트 비용이 없어서 석사학위 논문도 출판할 여력이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어머니께서 쌈짓돈을 보내주셔서 논문을 마감 시일 안에 제출할 수 있었죠”









회사 근무와 함께 대학 강의를 시작하다









궁핍한 생활 속에서 마냥 교수직만을 바라볼 수 없었던 그는 대한석탄공사에 입사하게 된다. 일반 사원이었던 그는 회사 지출내역을 담당하는 회계과에 배치됐다. 그의 전공과 전혀 다른 업무였기 때문에 일에 관한 지식도 독학을 통해 스스로 배워야 했다.









1년이란 시간이 지난 뒤 형편이 나아지자 김 교수는 직업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다. 소위 말하는 배는 부르지만 법학자의 꿈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 김 교수의 서재에는 항공우주법에 관한 다양한 논문집이 많았다. ⓒ스카이데일리

그는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故 서 교수를 찾아가 법학 강의를 진행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서 교수는 그의 스토리를 대충 알고 있었기에 고민 없이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강사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27세로 국민대 야간대학에서 해상·보험법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된다.









“야간대학에는 경찰, 군인, 공무원 등 학생들의 나이가 저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강사인지 모르고 학생들은 집중을 하지 않더군요. 출석부를 갖고 호명하니까 비로소 학생들이 착석해 수업을 진행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강사 시급이 적었기 때문에 김 교수는 낮에는 석탄공사에서 일했고 밤에는 대학 강의를 진행하는 등 쉴 틈이 없는 날들을 보냈다. 게다가 당시 국내에는 해상법에 관련된 자료들이 많지가 않아 독일어 원서를 통해 강의를 준비해야 했다.









“주경야독을 하면서 남들 놀 때 집안에서 강의 준비만 했습니다. 개인적인 시간을 갖지 못했지만 강의를 한다는 것 자체에 만족하면서 그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 교수는 철두철미한 성격을 갖고 있었기에 하루에 2~3시간을 자더라도 두 가지의 일을 완벽히 소화해 냈다. 이에 석탄공사에서 총무이사로 승진했고 사장 후보로도 거론됐었다.









하지만 배경이 약했던 그는 결국 사장 직에 올라서지 못했고 구조조정으로 인해 퇴사를 하게 된다. 이런 소식을 접한 한국화약주식회사(현 한화그룹)가 그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했다. 김 교수는 한국화약에 총무이사로 입사한다.









하지만 개인사업체였던 화약회사는 그에게 대학 강의 허락을 하지 않았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했기에 그는 강사직을 포기해야만 했다.









“우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항공우주법률을 만들며 학자의 꿈을 이어가다









이렇게 그는 화약회사에서 3년간 업무를 맡아오던 중 세종대학교 최옥자 이사장으로부터 학교에서 교수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학자의 꿈을 다시 이어갈 수 있는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는 이직을 원했지만 가족과 지인들은 급여가 높은 직장을 버려가면서까지 대학교수를 선택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그를 말렸다. 당시 김 교수의 월급은 120만원이었는데, 대학 교수직은 40만원에 불과했다. 회사 측도 사표수리를 하지 않았고, 그를 잡기 위해 노력했다.

















▲ 지난 2012년 6월 인도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역 우주법대회’에서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사진=취재원 제공>

하지만 그는 자신을 말리던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포부를 말하며 간곡히 설득했다. 이런 노력 끝에 김 교수는 대학교수로 이직하게 된다.









그는 법학과 교수로 활동하는 동시에 한국항공산업연구소 부소장직을 동시에 맡았다. 그 시대에는 항공우주법에 관한 법률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을 시기였다. 그는 항공우주법이 새로운 개척 분야라고 생각했다.









김 교수는 ‘항공운송인의 책임과 그 입법화에 관한 연구’에 관한 논문을 준비하면서 체계적으로 항공우주법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항공수요가 증가하는 반면 이에 대한 적합한 법률이 없었기 때문에 비행사고 발생 시 항공사의 약관에 따른 결정이 이뤄졌다. 이로 인해 공평하지 않은 판결이 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다고 김 교수는 회고했다.









이 같은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그는 미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일본, 중국 등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학술제를 방문하며 관련 지식을 쌓기 시작했다. 각국의 항공법 관련 전문교수들을 만나가며 타국과 국내의 항공법을 비교·조사했다. 김 교수는 원서를 한국어로 번역해야 했기 때문에 연구와 조사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정말 바쁜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습니다. 미국 대륙횡단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교환교수로 미국과 캐나다에 방문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정부 지원예산이 적었기 때문에 이동하기 위해서 하루 12시간을 운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캐나다 McGill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항공우주법에 관한 강의를 진행하면서 하버드 로스쿨을 비롯해 코넬대, 스탠퍼드대, 버클리대, 덴버대, 아메리칸대 등 미국 곳곳에 위치한 명문대학에 들려 항공우주법에 관한 강연에 참석하거나 연구자료를 수집했다.

















▲ 김 대표는 지난 2004년 중국 북경에서 개최된 ‘국제우주법대회’ 초청연사로 참석했다. <사진=취재원 제공>

“이동 중에 어떤 괴한이 가방을 훔쳐가서 세 달간 작성한 논문을 다시 써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여권과 경비는 품속에 소지하고 있었기에 다행이었죠”









30여년 만에 국회 통과된 항공운송법안 ‘감개무량’









학문적 지식과 소양을 갖춘 그는 상법 ‘제6편 항공운송’이라는 새로운 법안을 신설해 항공사가 승객에게 손해를 입혔을 경우 책임을 부담해야 된다는 법안을 교통부(현 국토교통부)에 제안했다. 하지만 교통부는 건설업과 육상 및 해운정책 발전에 주력하고 있던 상황이어서 그의 법안을 검토할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피해는 속출했다. 1997년 대한항공 801편이 미국의 괌에 있는 안토니오 비 원 팻 국제공항에서 착륙에 실패해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었다.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 231명과 23명 중 총 225명이 사망했고 29명이 부상을 입었다.









유족들은 한국 재판소에 소송을 걸었으나 합리적인 보상을 받지 못했다. 심지어 해외 변호사를 고용해 미국 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청구하는 유족들도 있었다.









“그 때 저에게 자문을 받으러 오는 피해자들이 많았습니다. 법이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됐죠. 그래서 매번 제안을 했지만 통과되지 않아 답답한 심정이었습니다”









교수, 판사, 변호사 등과 팀을 구성해 ‘항공운송계약법요강안’을 작성하면서까지 법안을 제안했지만 결과는 암울했다. 팀마저 해체돼 법안이 통과되지 않을 듯했다.

















▲ 지난 2010년에 방콕에서 개최된 ‘UN우주법 Workshop’에 초청연사로 참석한 김 교수.(왼쪽에서 두번째) <사진=취재원 제공>

김 교수는 지난 2006년 공군회관에서 개최된 ‘항공우주법세미나’에 참석해 김준규 전 검찰총장(당시 법무실장)을 만나게 되면서 완전히 달라진 상황을 만들게 된다. 세미나에서 그는 새로운 법안을 김 총장에게 설명했다. 김 총장은 법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수용까지 했다.









김 교수는 지난 2007년 법무부로부터 ‘항공관련 법제도 정비연구’에 대한 용역을 받았고 항공법 전문가 5명과 함께 6개월간 연구를 한 끝에 법안을 다시 제안했다.









마침내 2011년 4월 29일 그의 법안은 국회를 통과했고 5월 23일 공포됐다. 항공법 연구 이후 30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시행된 것이었다.









“학자로서 항공법에 관해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문제점을 고치고자 많은 노력을 했고 이것이 30년이 흐른 뒤에 빛을 발하게 됐습니다. 감개무량했습니다. 한국 항공기술은 다른 국가에 비해 부족할 수 있지만 법안 통과로 인해 법률분야에서는 더 앞서게 된 것입니다. 앞으로 국민들이 비행사고 시 합리적인 배상을 받는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현재 그는 국제우주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다가올 우주산업에 대비하겠다는 의지다.









“앞으로 50~60년 뒤면 지구 에너지가 고갈된 것이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달과 화성 등 우주자원을 사용해야 될 시기가 다가온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면 광물 채굴권에 관한 법률이 있어야 우주자원사업에서 한국이 입지를 차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www.skyedaily.com ⓒ 스카이데일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