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운형 세아그룹 회장을 처음 만난 건 올 1월4일 대한상공회의소 신년인사회에서였다. 그는 초면의 기자에게 철강산업의 미래, 세아그룹의 도전과 꿈에 대해 짧지만 친절하게 들려줬다. 철강시장 침체로 계열사들의 주가가 떨어지는 등 어려움에 빠진 그룹 경영에 대해선 “특수강 등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혹독한 철강시황을 극복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세아’라는 사명(社名)엔 ‘세상을 아름답게’라는 뜻을 담았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지난 1월 말엔 새로 입주한 서울 합정동 세아홀딩스 사옥으로 기자를 초대했다. 대화할 때는 자신의 공(功)은 낮추고, 타인의 장점을 높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40년 철강 사나이는 “경쟁사와의 역학 관계, 앞으로의 투자 계획을 말해달라”는 기자의 질문을 적당히 눙치며 “뛰어난 경쟁자와 겨뤘기 때문에 그룹이 발전했고, 한국의 철강산업이 세계 일류가 될 수 있었다”고 답했다.

주변을 세심하게 챙기는 면모도 읽을 수 있었다. “경기고 2년 후배인 한덕수 한국무역협회 회장 부인인 최아영 작가의 전시회에 몰래 들러 그림을 사려고 했더니 ‘회장님이 그림을 사주면 남편에게 혼난다’는 핀잔만 듣고 왔다”며 웃었다. 또 “지인이 카페를 새로 열었는데 음료 쿠폰을 얻었다”며 “난 거기 들를 일이 없고 젊은 사람은 좋아할지 모르겠다”며 선물로 줬다.

국립오페라단 이사장을 맡게 된 데 대해선 “평소 알고 지내던 박수길 한양대 성악과 명예교수가 맡아달라기에 승낙했던 것”이라며 “덕분에 본격적으로 오페라를 공부했고, 예술가에게 존경심이 생겼다”고 했다. ‘예술을 사랑하는 철강업계의 신사’로 불리는 까닭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이 회장이 지난 10일 먼 타지에서 유명을 달리해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한 직원은 “회장님은 직원들이 엘리베이터를 탈 땐 문을 잡아주고, 질책보다는 칭찬을 먼저 하시던 분”이라며 슬퍼했다. 고인은 동생 이순형 세아홀딩스 회장과 형제 경영체제를 구축해 연 매출 7조원, 업계 4위권의 철강 전문그룹을 일궈냈다. 자신을 내세우는 일을 꺼렸다. ‘내실 경영’은 그의 지론이었다. 주변을 돌아보고 문화예술을 사랑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어했던 고인을 애도한다.

김대훈 산업부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