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을 향한 새 대통령의 일성(一聲)은 ‘국민 행복시대’를 열어가겠다는 약속이었다. 국민 행복시대를 기반으로 한반도 행복시대를 열겠노라는 원대한 포부도 들려주었다. 그 누군들 행복을 마다하리요. 이제 국민 행복이 국정 운영의 우선 순위에 확실히 자리매김됐으니 머지않아 진정으로 국민 모두가 행복한 시대가 열릴 것이란 희망을 품어봄직하다.

하지만 ‘행복’이란 단어는 곰곰 들여다보면 실체를 포착하기 만만치 않은 ‘교묘한’ 개념이란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행복은 우리에게 꿈과 희망, 충만함과 풍성함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단어이기도 하지만, 때론 우리를 허위의식 속에 빠뜨리고 현실의 가혹함을 외면하도록 현혹시키는 단어이기도 하니 말이다. 실제로도 행복에 관한 정의를 둘러싸고 10인 10색 저마다의 생각을 풀어놓고 있음에랴.

바로 이 행복이란 단어가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사회적 논쟁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다. “페미니즘은 실패로 끝났다. 페미니즘은 여성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다”는 유명 여성잡지 편집장의 주장을 두고 새삼 행복을 둘러싼 논쟁이 촉발됐던 것이다.

이에 대해 “페미니즘은 결코 여성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 부자도 가난한 이도, 주인도 노예도 저마다의 수준에서 모두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가 여성에게 약속했던 건 고통스럽더라도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 돼라는 메시지였다”는 것이 당시 페미니스트들의 응답이었다.

실제로 미국에서 노예해방이 이뤄지자 남부의 흑인노예들은 해방의 기쁨을 누리고 자유를 찾아 나서기보다, 옛 주인에게로 다시 돌아가 “주인님과 함께 지냈을 때가 도리어 행복했으니 다시 저를 받아주십시오”하며 무릎 꿇고 애원했음은 역사가 기억하고 있는 실화다. 그러니 행복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면 매우 신중하게 숙고해야 할밖에.

물론 행복이 현대사회의 주요한 가치 중 하나로 부상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행복을 중시하는 현대인의 정서는 ‘자아(self)의 확대’와 더불어 ‘큰 구조(big structure)’에 대한 관심보다 ‘작은 이야기들(small narratives)’에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분석과 맥이 닿아 있다.

한 예로 세계 어딘가에서 국지전(局地戰)이 발발할 경우 현대인들은 세계 열강 간의 파워 각축이나 글로벌 자본주의의 개입 여부와 같은 큰 구조와 연관지어 생각하기보다는 ‘전쟁 발발이 혹여 우리 경제 발목을 잡아 내가 실직을 하게 되면 어쩌나, 그로 인해 우리 가족의 생계가 위협을 받으면 어쩌나’에 촉각을 곤두세운다는 것이다.

오늘날 행복은 주관적이거나 심리적 수준에 머물던 것으로부터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지표에 따라 측정 가능한 사회현상으로 보고자 하는 시도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런 시도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 중 하나로 사람들이 행복을 경험하는 영역에 관한 연구가 있다. 결과는 건강, 친구, 가족처럼 소박한 경험 속에서 행복을 느끼리라 예상됐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일의 세계, 여가, 그리고 경제적 풍요로움 순으로 행복을 느낀다는 응답이 높게 나타났다.

이들 결과가 자본주의 사회의 속물적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냉소적 해석도 있었지만, 현대인들의 솔직한 속내가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이란 해석도 뒤따랐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를 미소짓게 하는 슬로건으로서의 행복이 아니라, 구체적인 우리네 삶 속에서 행복을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 일 게다.

이 대목에서 행복한 삶의 일차적 요건으로 ‘삶의 방향 감각’을 제시한 흑인 페미니스트 벨 훅스의 주장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뚜렷한 삶의 목표를 지니고, 그 목표를 실현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진정 행복하리라는 것인데, 우리의 소중한 삶 속에서 저마다의 행복을 실천할 수 있도록 ‘국민 행복시대’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함인희 <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hih@ewha.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