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의 탐욕’ ‘시장의 실패’ ‘시장의 권력’. 이 정도면 시장은 자체로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된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는 부당한 ‘의인화(擬人化)’가 아닐 수 없다. 시장에 대한 왜곡과 논리 비약은 이 같은 의인화에서 온다.

‘시장’은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는 개인의 경제행위가 조정되는 장(場)이며 ‘시장질서’는 시장을 작동하게 하는 ‘공정한 행동준칙’인 것이다. 내 것을 지키되 남의 것을 존중하며, 남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배상하고, 계약을 충실히 지키는 것 등이다. 이 같은 소유의 인정, 동의에 의한 소유이전, 불법행위 금지, 약속 이행 등의 행동준칙이 외부 세계와의 ‘접촉범위’를 넓혀 소집단의 폐쇄성을 극복하게 한 것이다.

시장이 모든 개인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전망과 가능성을 높여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장은 특정인에게 특정재화를 사전에 할당하지 않으며 오히려 잘못된 기대와 계산에 기초한 의도를 예외 없이 처벌한다. 시장은 차라리 냉혹하다. ‘탐욕’이 끼어들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장의 실패’ 역시 잘못된 의인화다. 시장이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정책이 실패하는 것이다. 좌파가 신자유주의 실패의 금과옥조로 여기는 2008년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도 그 기저에는 ‘정책의 실패’가 자리잡고 있다. 집을 사야하는지 여부를 시장이 결정하게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즉 ‘신용이 부족한 사람도 집을 사도록 사회·경제적으로 몰고 간 것’이 위기를 초래하게 한 단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를 기초자산으로 발행된 파생상품을 적절하게 규제하지 못하고 집값 거품을 일게 한 초저금리를 장기간 방치한 것도 정책 실패인 것이다.

‘시장의 권력’은 의인화의 절정을 이룬다. 시장권력이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의 권력은 소비자와 투자자가 부여한 것이다. 소비자가 제품을 사고 투자자가 자금을 대는 것은 그 기업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장 권력은 ‘경쟁력’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 시장권력에는 임기가 없다. 경합관계에 있는 경쟁자를 이기지 못하면 언제라도 권좌에서 내려와야 한다. 노키아와 소니의 몰락은 기업의 경쟁력이 ‘상수(常數)’가 아님을 보여준다. 상업세계에서 성공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새마을식당과 놀부보쌈은 더 이상 구멍가게가 아니다.

최근 한 유력인사가 박근혜 정부의 ‘경제민주화’ 공약 후퇴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시장경제의 기본원리가 탐욕이기 때문에 탐욕에 제재를 가하지 않으면 재앙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시장의 탐욕을 누가 어떻게 억제해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국가가 사회적 합의에 기초해 시장의 탐욕을 제어해야 한다”는 답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면 국가는 개인의 이해를 조정할 만한 ‘계산능력’이 있으며 이를 뒷받침할 만큼 전지(全知)한가를 물어야 한다. 그 같은 논리대로라면 ‘국가의 개입’이 최대화된 사회주의체제가 더 효율적이고 정의로워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시장질서’를 대체할 수는 없다.

‘사회적 합의’는 무엇이든 가능한가? 실존하는 인간 밖에 존재하는 초월적 절대자가 존재할 수는 없을 터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합의도 이런저런 이해관계의 이끌림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누군가의 이익은 다른 누군가의 손해를 수반한다. 특정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처분법은 사회갈등 요인으로 작용한다. ‘비인격적(impersonal)’인 시장이 ‘재량적’인 국가권력보다 더 효율적이고 정의로운 이유다. 시장의 권력을 제어하는 것은 정치권력이 아닌 ‘공정한 경쟁질서’에 기초한 경쟁촉진이어야 한다.

시장의 의인화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체가 ‘반(反)시장’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기 위해서는 ‘시장을 통해’ 개개인의 잠재된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적(敵)을 공격하는 것만큼 허구는 없다. 시장과 싸우는 것이 정책일 수는 없다. 시장권력 위에 정치권력을 위치시키는 것이 ‘경제민주화’라면 차라리 시장의 탐욕을 적극 허용하는 편이 낫다.

조동근 < 명지대 교수·경제학,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dkcho@mj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