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소서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자소서를 써야 하는 많은 이들의 고민을 생각하면 더없이 미안한 말이겠지만, 자소서는 재미있는 글이다. 거기에는 한 사람, 그것도 막 인생의 꽃을 피우려는 청년의 솔직한 자기진술이 담겨 있으며, 처음 마주서는 세상을 향하여 그들의 최선을 보여주려는 앳된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림엽서 같은 예쁘장한 소품도 있고, 정갈한 보고서도 있으며, 소재가 메말라버린 작가들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할 취재노트도 있다. 취업에서 자소서의 중요성이 커진다고 하니까, 이것 역시 규격화의 바람을 피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인생의 표준이 어디 있다고 ‘표준형 자소서’가 등장하고, ‘합격 자소서’ 모범답안이란 것들이 거래된다고 한다. 이러다간 곧 천편일률적인 대입논술의 재탕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겠다 싶어 씁쓸한 생각이 든다. 내가 읽어본 자소서에도 그런 규격화의 경향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저마다 자신이 리더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으며, 리더십을 갖춘 인재라고 자평하는 자소서가 70%를 넘는다는 점이다. 이런 비율이 진실이라면 한국사회는 전자제품과 함께 리더 수출을 정책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진술하는 리더의 경험은 빈약하기 짝이 없다. ‘팀원과 잘 놀아주고’ ‘아픈 팀원을 잘 돌보았고’ ‘책임감을 갖고 내가 일을 더했다’ 같은 가부장의 역할을 ‘리더’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기업과 단체에서 정작 리더십 인재만을 원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자기자신의 리더가 되는 사람, 거기에 전체를 생각하는 팔로어십을 갖춘 인재가 아닐까?

둘째, 여러 가지 일을 잘 해내는 문어발의 능력을 앞세우는 경향이다. 그러다 보니 ‘한 가지 일에 매달리는 성격이라서 여러 일을 할 수 없는 게 단점’이라고 반성문을 쓰는 자소서도 심심치 않게 있다. 그러나 기획-연구-실행의 프로세스가 있고 매순간 판단을 요구하는 업무에 이런 멀티태스킹 능력이 정말 효과적일까? 컴퓨터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기계지상론자가 아니라면 역시 인간은 몰입을 통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하고 싶은 일, 될 것이라고 판단되면 무섭게 빠져든다’고 하는 선택과 집중의 능력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끝으로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많은 자소서가 성장과정을 진술하면서 빠뜨리지 않고 강조하는 것이 아르바이트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궂은 일을 해서 학비를 번 것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다. 아르바이트가 세상 경험의 유일한 장이나 된 듯 여긴다는 사실이다. 왜 한국의 청년들은 책을 통해서가 아니라 편의점과 레스토랑 바닥에서만 세상을 배웠다고 한결같이 말할까?

뿐만아니라 적지 않은 자소서를 읽어봤지만 ‘내 인생을 바꾼 책’은커녕 무슨 책을 인상깊게 읽었다는 진술을 단 한 편도 보지 못했다. 이런 교양 무시풍조는 자소서를 요구하는 기업과 단체 쪽에도 책임이 있다. 한국사회가 근 10년 인문학 열기를 내뿜었지만 어느 자소서에도 ‘당신은 어떤 책을 얼마나 읽었습니까’라고 물어보는 항목은 없다. 마치 ‘교양 따위는 필요없다, 능력만 갖춰다오’를 요구하는 듯하다. 잔디밭에 디딤돌을 놓을 때는 반드시 신발 크기보다 넓은 돌을 깔아야 주위 잔디가 상하지 않는다. 인문학이든 교양이든 그것이 한 사람의 능력을 온전하게 해주는 디딤돌이라는 사실을 자소서를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 모두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우종근 <자소서 컨설턴트·감성공방 담연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