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이 넘는 직원을 데리고도 3명에 불과한 필리핀 법인보다 돈을 못 버니 본사에선 한국 법인을 필리핀 법인보다 홀대합니다.”

한 외국계 증권사 한국 대표는 얼마 전 사석에서 이렇게 하소연했다. 엄살처럼 들려 “설마, 100명이 3명을 이기지 못하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작년 실적을 비교하며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사연은 이랬다.

필리핀 정부의 채권 발행을 증권사가 주관하면 수수료로 발행금액의 6~7%를 받는다. 한국은 각종 주관 수수료가 필리핀보다 형편없이 낮다. 예금보험공사가 현재 추진하는 한화생명 블록딜(시간외 대량매매)의 경우 주관 수수료는 0.01%로 알려져 있다. 단순하게 비교하더라도 600~700배 차이다. 그러니 한국 법인 직원 33명이 달라 붙어도 필리핀 법인 직원 1명을 당해낼 수가 없다는 게 이 증권사 대표의 설명이었다.

그는 한술 더 떠 “필리핀 시장의 수수료가 국제 금융시장에서 유별나게 높은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미국 나스닥시장에서 기업공개(IPO)를 주관하는 증권사가 받는 수수료도 5~6% 수준이라고 했다. “100년 넘게 깨지지 않는 일종의 불문율”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떠오르는 자본시장인 중국에서는 ‘증권사들이 부르는 게 값’이란 농담이 돌 정도라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한국의 주관 수수료는 왜 이렇게 싸졌을까. 외국 증권사 대표는 증권사들의 ‘제살 깎아먹기식’ 과당경쟁을 원인으로 꼽았다. 그러다 보니 외국계 증권사에 국내 시장은 재미없는 시장이다. 영국계 RBS와 바클레이즈의 투자은행(IB)부문이 한국에서 철수키로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 외국계 증권사 대표는 “앞으로도 상당수 외국 증권사가 한국을 빠져나갈 것”으로 내다봤다.

수수료가 낮아지면 기업으로선 나쁠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게 외국계 증권사 대표의 설명이다. 인수·합병(M&A) 시장에 나온 미국이나 유럽 기업에 대한 정보는 외국계 증권사의 아시아 대표부를 통해 각국에 소개된다. 증권사들로선 수수료를 비싸게 받는 국가에 먼저 소개한다. 수수료가 적은 한국 기업들엔 다른 나라에서 팔리지 않은 기업들을 소개한다고 한다. 외국계 증권사 대표는 “본격적으로 해외기업 인수에 나선 한국 기업이 소개받는 매물은 중국 등에서 외면받은 기업”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정영효 증권부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