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남지 않은 백발을 휘날리며 포디움에 올라선 노(老)지휘자가 지휘봉을 흔들자 마법이 시작됐다. 지난달 28일과 지난 1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LSO)의 내한 공연. 네덜란드 출신 마에스트로 베르나르트 하이팅크(84·사진)는 세계 최정상급의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만났을 때 어떤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지 보여줬다.

28일 공연을 시작하며 LSO는 한국 관객에게 인사라도 하듯 영국 작곡가 벤저민 브리튼의 오페라 ‘피터 그라임즈’의 전주곡 중 ‘새벽’ ‘일요일 아침’ ‘달빛’ ‘폭풍’을 들려줬다. 악기마다 제 실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곡인 동시에 오케스트라의 맨얼굴이 그대로 드러나는 무서운 곡이기도 하다.

하이팅크는 절도 있고 명료한 움직임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나갔다. 음악이 느리게 진행되는 부분에서는 커다란 동작 대신 미세하게 손끝을 떨었다. 단원들은 지휘자의 조그만 움직임에도 기민하게 반응했다.

첫날 들려준 베토벤 교향곡 7번에서도 오케스트라의 실력을 느낄 수 있었다. 경쾌하게 진행되는 1악장에서 하이팅크는 또렷하게 한 음씩 짚어냈다. 전개부를 착실하게 끌어올려 ‘신나기만 한 곡’이 되는 것을 피했다. 1악장의 진지함 덕에 콘트라베이스와 첼로의 앙상블로 시작한 2악장의 장중함이 설득력을 더했다. 4악장에 들어서는 그동안 잘 예열했던 엔진을 가동한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하이팅크는 숙련된 레이서처럼 오케스트라를 피날레로 이끌어갔다.

곡이 끝나자 청중의 환호성과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하이팅크는 36년 만에 재회한 한국 청중의 박수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커튼콜에 응했다. 그는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을 앙코르로 선사하며 꿈과 같은 시간을 더했다. 이튿날 브루크너 교향곡 9번도 첫날과 마찬가지로 박수갈채를 받았다.

LSO와 함께 17년 만에 한국을 찾은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르스(69)도 ‘모차르트 스페셜리스트’란 명성을 입증하는 듯한 연주를 선보였다. 첫날 연주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17번은 투명한 음색이 인상적이었다. 2악장의 서정적인 선율에서 그의 연주가 빛을 발했다. 하이팅크는 오케스트라의 셈과 여림을 극명하게 대비하며 피아노의 조연 역할을 자처했다. 방한 전 이메일 인터뷰에서 “모차르트뿐만 아니라 베토벤도 관심을 갖고 들어달라”고 말한 그는 둘째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2번도 흔들리지 않는 연주로 마무리했다.

이승우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