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안 해 주면 내 가슴에 총을 쏘겠소"…사랑의 총알 남발한 드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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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스토리 - 예술가의 사랑 (39) 클로드 드뷔시
프랑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음악가 중 한 사람인 클로드 드뷔시(1862~1918). 그의 작품들은 ‘조각배’ ‘꿈’에서 보듯 마치 한 편의 감미로운 서정시 같다. 그러나 겉보기에 잔잔해 보이는 그의 음악은 전통을 무자비하게 파괴함으로써 쌓아올린 것들이다. 그는 선배들이 쌓아온 음악적 관행들을 깡그리 무시해 버렸다. 그의 반골 기질은 열 살 때 입학한 파리음악원 시절에 이미 싹을 보였고 그의 지도를 맡은 스승들은 이 악동의 고집에 혀를 내둘렀다.
그의 사랑 방정식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기의 감정뿐이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윤리 도덕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런 그의 ‘일방통행식’ 사랑이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열여덟 살 때였다. 파리음악원에 재학 중이던 그는 마르몽텔 교수의 추천으로 러시아인으로서 당대 최고의 예술후원자였던 나자데 폰 메크 부인의 여름 휴가 동반자가 됐는데 이때 그는 겨우 열다섯 살인 폰 메크 부인의 딸 소냐와 사랑에 빠져 부인에게 결혼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고 한다.
그의 막무가내식 사랑이 그 본성을 드러낸 것은 파리에 돌아와 피아노 반주 일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한 성악수업에서 마리 바니에 부인의 노래 반주를 맡게 됐는데 당시 서른 살이었던 부인은 빼어난 미모에 성악에도 재능을 지녀 드뷔시의 마음을 흔들어놨다. 드뷔시는 바니에 부인과 그의 남편 앙리로부터 그들의 저택에 자주 초대를 받았고 나중에는 피아노가 딸린 연습실을 제공받아 경제적 부담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자상하게 다가선 바니에 부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고 부인도 이 충동적이고 감성적인 청년의 유혹에 빠져들고 만다.
호의를 베푼 앙리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제를 확대하지 않고 드뷔시의 행동을 나이 어린 청년의 치기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전과 마찬가지로 청년이 음악가로 대성할 수 있도록 묵묵히 배려했다. 그런 그의 노력에 힘입어 드뷔시는 1884년 로마대상 음악부문 수상자가 되어 로마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바니에 부인에 대한 그의 사랑도 자연히 사그라졌다.
2년간의 로마유학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그의 눈에 처음으로 들어온 여인은 가브리엘 뒤퐁이었다. 재단사의 딸인 그는 녹색 눈에 금발을 한 여인으로 아마도 유흥가에서 충동적으로 맺어진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드뷔시는 지성은 없지만 순진하고 정 많은 이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듯하다. 그의 최대 걸작의 하나로 평가되는 ‘목신의 오후를 위한 전주곡’을 가브리엘에게 바친 것만 봐도 그의 마음이 어땠는지 잘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드뷔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벨기에 화가의 딸 카르린 스테방, 여가수 테레즈 로제, 로댕의 연인으로 유명한 조각가 카미유 클로델은 그의 연인 목록 중 아주 일부일 뿐이다. 꾹꾹 참으며 애써 평상심을 유지하던 가브리엘은 드뷔시의 주머니에서 농염한 사랑의 문구가 적힌 편지를 발견하고 권총자살을 기도한다. 그의 무분별한 사랑좇기는 친구들로부터 분노를 샀고 에른스트 쇼송 같은 친구는 그와 절교를 선언한다.
1899년 그는 뒤퐁을 떠나 패션모델인 릴리 텍시에와 결혼한다. 텍시에는 이 감당하기 어려운 청년이 부담스러웠지만 자신과 결혼해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위협에 굴복, 결국 청혼을 받아들인다. 텍시에는 정감있고 화끈한 여인으로 드뷔시의 친구와 지인들도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드뷔시는 텍시에의 지적인 한계를 절감하면서 또다시 한눈을 팔게 된다.
1903년 그는 은행가의 부인인 엠마 바르닥을 알게 된다. 바르닥 부인은 세련된 매너와 교양을 갖춘 데다 수준급 성악가이기도 했다. 지성과 감성을 두루 갖춘 드뷔시의 이상형이었다. 1904년 그는 텍시에 몰래 바르닥 부인과 영국으로 밀월여행을 다녀온 후 친정에 가 있던 텍시에에게 편지로 이혼을 통보한다. 결혼을 안 해주면 자살하겠다고 하던 그가 불과 5년 만에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것이다.
절망한 텍시에는 결혼 5주년을 5일 앞둔 11월14일 콩코드 광장에서 권총 자살을 감행한다. 총탄이 가슴 속에 박혔지만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 그는 자살로 자신을 위협했던 남편에게 자살로 복수하려 했던 것이다. 이 기막힌 치정사건은 언론을 요란스레 장식했고 드뷔시의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고 바르닥과 맺어졌지만 둘의 결혼 생활은 생각했던 만큼 행복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그가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딸인 슈슈뿐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내리사랑인 자식만이 그에게 지속적인 사랑의 감정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랑의 불한당’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가브리엘과 동거 시절 친구 고데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그런 심사가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늘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상처를 입히게 되고 시간이 지나면 그것을 후회하게 된다며 괴로운 심사를 토로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럴 때마다 그에게 힘이 돼준 것은 음악이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예술만이 모든 것을 치료해준다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순인가.” 그의 음악이 가져다주는 마음의 평화는 고통스러운 사랑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