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호함'은 협상의 최대 敵…작은 갈등부터 하나씩 해결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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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BIZ School] 최고경영자 과정 지상중계 (17) 협상의 이해와 전략
먼저 상대방의 말 경청하고 내 생각 상대방에 다시 전달…협상과정 통해 이견 좁혀
소송·분쟁은 이겨도 상처…갈등, 미세한 조정부터 시작…'작은 승리' 전략 필요
먼저 상대방의 말 경청하고 내 생각 상대방에 다시 전달…협상과정 통해 이견 좁혀
소송·분쟁은 이겨도 상처…갈등, 미세한 조정부터 시작…'작은 승리' 전략 필요
“한국 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법이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저는 판결문을 대중에게 공개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피고는 원고에게 ooo하라’라는 주문뿐 아니라 판결 이유까지 자세히 대중에게 밝히는 것입니다.”
KAIST 경영대학 최고경영자과정(AIM) 가을학기 열일곱 번째 시간. 김철호 KAIST 경영대학 협상론 교수는 한국과 미국의 판결문을 비교하며 사법 정의에 대한 논의로 강의를 시작했다.
○사법 정의를 세우려면 판결문 공개
김 교수는 미국 법원의 판결문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단계로 구성된다고 설명했다. ①실체적 진실은 무엇인가 ②문제되는 쟁점은 무엇인가 ③결론은 무엇인가 ④그 결론을 낸 이유는 무엇인가의 순서다.
“미국 법정의 판결문은 이 순서를 꼭 지키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사건이라도 30~40쪽가량 됩니다. 게다가 모든 판결은 책으로 출판해 대중에게 공개하도록 합니다. 판결문을 당사자만 볼 수 있도록 하는 한국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죠. 자신의 판결문이 공개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판결이 엄청나게 신중해질 수 있다고 봅니다.”
정보 공개의 유용성은 사법 정의뿐 아니라 시장 경제 활성화에도 적용된다는 것이 김 교수의 분석이다. 인간의 탐욕에 의해 금융 위기나 불황과 같은 시장 실패가 발생할 때 많은 이들이 규제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규제를 어느 부분에서 어떤 범위까지 할 것인가에 대해 정답을 찾기란 쉽지 않다.
“최대한 많은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시장이 제 기능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가장 쉽고도 간단한 길입니다. 국회의원이나 공무원들이 아무리 많은 규제를 만든다고 해도, 결국 틈은 생기게 마련이죠. 과도한 규제가 낳는 부작용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본시장에 공시라는 시스템이 도입된 것은 기업이 투자자나 주주 같은 이해관계자에게 정보를 공개만 하면 규제는 자연스럽게 이뤄진다는 철학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한 수강생이 “판결문이 대중에게 공개되면 사생활이나 비밀 보호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김 교수는 ‘선택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판결문을 공개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과 사적인 권리 가운데 무엇을 더 중요하게 볼 것인가의 문제가 물론 발생합니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도라는 것은 애초에 없으니까요. 우선 판결문 공개로 국가와 사회의 정의가 세워진다면 사생활은 어느 정도 침해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소송을 제기하는 사람은 사생활 공개라는 부분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신중하게 재판을 청구할 수 있죠. 또 소송을 당해 사생활이 공개될 수 있다는 위험을 사람들이 생각한다면 평소에 권한을 남용하는 일도 줄어들 수 있습니다.”
○소송이나 분쟁을 해결하는 협상
김 교수는 현대사회를 규율하는 법에는 세 가지 체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소유권 등을 다루는 재산법 △계약에 관한 법 △회사, 조합 등 집단에 관한 법 등이다.
“재산법은 내가 일해서 생긴 재산은 내 것이라는 평범하지만 중요한 규율입니다. 이것이 잘 지켜져야 사람들이 일을 하죠. 계약법은 사람과 사람을 동등한 입장에서 거래하도록 해주는 법입니다. 집단법은 주식회사나 조합같이 사람의 모임이 갖는 특수성에서 생겨난 법이고요. 이 세 가지 규범이 자리를 잡으면서 근대 자본주의도 뿌리내리게 된 것입니다. 협상학은 이 세 가지 규범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적용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김 교수는 이어 1985년 당시 105억달러라는 사상 최대의 손해배상 결정이 내려진 펜조일 대 텍사코 사례를 소개했다. 당대 최대 석유회사 가운데 하나였던 게티오일의 소유주인 고든 게티는 펜조일과 87억달러에 회사를 넘기기로 가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최종 계약은 99억달러를 제시한 텍사코와 체결했다. 펜조일은 텍사코가 게티오일을 가로채가는 통에 주가 하락으로 60억달러에 이르는 손실을 입었다며 손실액의 두 배가 넘는 140억달러를 손해배상금으로 청구했다.
“법원은 펜조일과 게티오일의 계약이 이미 성립했다고 봤습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텍사스 법정의 배심원들이 그렇게 판단한 것이죠. 텍사스 사람들 특유의 기질이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텍사스 사람들은 정당방위에는 관대하지만, 비겁한 것은 용서가 안 된다고 하죠. 만약 월스트리트에서 이 같은 재판이 벌어졌다면 펜조일이 이기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텍사코는 곧바로 항소했지만 최종심에서도 져서 결국 손해배상금이 112억달러까지 높아졌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펜조일에 지급한 금액은 30억달러로 낮아졌다. 협상에서 성공한 것이다. 이 사건은 경영이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불필요한 소송이나 싸움은 손해라는 인식이 퍼지는 가운데 기업들은 협상전문가를 뽑아 키우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이도 ‘최후의 카드’가 있다
“미국의 원자력 발전은 민간기업들이 합니다. 역시 민간기업인 웨스팅하우스가 각 지역의 발전업체들에 원자로를 공급하죠. 원자로만 지어주고 끝이 아닙니다. 사업 특성상 웨스팅하우스가 유지·보수도 해야 하고, 우라늄도 지속적으로 공급해줘야 합니다. 그런데 1970년대 석유파동이 발생하면서 우라늄 값도 덩달아 뛰기 시작했습니다. 웨스팅하우스는 자칫하면 수십 개 민간 발전업체들에 수십억달러 손해를 보면서 우라늄을 공급해야 할 상황에 처했습니다.”
웨스팅하우스가 ‘계약 당시 예상할 수 없었던 상황’이라는 이유를 들어 계약을 파기하자 발전업체들이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펜실베이니아주 지방법원에서 대표적인 재판이 벌어졌다.
“규모가 큰 소송이 대부분 그렇듯, 길고 지루한 공방이 오갔습니다. 1년 넘게 결론 없이 앙측 주장과 논리만 난무하자 판사는 소송을 대리하는 변호사들 대신 각 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을 불러모아 조정에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단 며칠 만에 양측이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왜일까요? 목적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법적으로는 지역 발전업체들에 승산이 있는 게임이었다. 하지만 발전업체들이 이긴다고 해서 과연 진정한 이익일까 하는 문제, 즉 소송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CEO들은 법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하게 봤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소송에서 지면 파산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웨스팅하우스가 망하면 발전업체들도 유지·보수를 못하니까 결국 같이 망할 수도 있는 상황이 되는 것이죠. 게다가 웨스팅하우스가 파산해버리면 소송 비용도 못 건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처럼 협상에는 ‘최후의 카드’가 있습니다. 갑(甲)과 을(乙)의 관계에서 을에게도 이런 파산 카드가 있다는 것을 앞으로 협상 과정에서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목적과 이익에 근거한 협상
김 교수는 이어 갈등에 대한 세 가지 접근법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권리에 근거한 접근이다. 옳고 그름을 기반으로 하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실패하기가 쉽습니다. 객관적인 정의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죠. 너무 법을 따지다 보면 그걸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사회적인 약자들이 대거 들고 일어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두 번째는 힘에 근거한 접근법이다. 대표적인 것이 파업이다. 역시 상황을 타개하는 데 효과적인 접근법은 아니라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세 번째는 이익에 근거한 접근법입니다. 양쪽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자연스럽게 공통적으로 이익이 되는 부분을 찾게 됩니다. 이익에 근거한 접근, 또는 목적에 근거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과는 상당히 높지만 실제 우리 생활에서 첫 번째나 두 번째 접근보다 많이 쓰이지 않습니다. 리더가 되려면 목적과 이익에 근거한 협상을 항상 염두에 두십시오.”
김 교수는 또 협상에서 ‘작은 승리’부터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많은 갈등은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 미세한 조정부터 시작해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갈등은 근본적인 원인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사라지기 어렵습니다. 한쪽이 완전히 만족하면 다른 쪽이 만족하기 어려운 것이 보통이죠. 때문에 협상은 서로에 대한 불만을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작은 것부터 차근차근 얻어내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양(量)의 축적이 결국은 질적인 변화를 낳게 됩니다.”
김 교수는 협상의 과정에서 지켜야 할 원칙으로 ‘절차적 공정성’을 제시했다. “협상은 본래 결과를 공정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의 공정성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문에 협상 과정부터 공정하게 시작해야 하는 것이죠. 절차적 공정성의 핵심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경청은 단지 예의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대방의 말을 잘 듣고 자신의 언어로 바꿔서 다시 한 번 상대방에게 확인을 받아 보십시오. 협상 과정에서 수많은 문제의 원인이 되는 ‘모호함’을 크게 줄일 수 있습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
강의 = 김철호 KAIST 경영대학 협상론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