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권사 58개 해외 법인…2010년 660억·2011년 990억 손실
글로벌IB와 정면승부 나선 대형사, 3년여만에 업무·조직 대폭 축소
해외진출, 단기성과주의가 문제…최소 10년 각오하고 투자해야
한때 ‘한국의 골드만삭스’라는 말은 모든 한국 금융투자회사들의 ‘꿈’이었다. 금융투자회사도 더 이상 좁은 ‘안방’에서만 경쟁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통해 글로벌 금융회사로 도약하겠다는 의지가 집약적으로 담긴 말이었다.
그러나 최근 금융투자업계에선 ‘한국의 골드만삭스’를 얘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1990년 이후 저마다 해외 진출을 시도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증권사들은 미국 중국 영국 등지에 총 58개(2012년 말 기준)의 현지법인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이들 현지법인은 2010년에 660억원, 2011년에 990억원의 순손실을 냈다. 2009년에는 80억원의 순이익을 내긴 했지만 증권사들의 전체 순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31%에 불과했다. 해외 사업이 아직까지는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한 것이다.
◆삼성·우리투자 해외 실험이 남긴 교훈
국내 금융투자회사에서 해외 비즈니스의 첫발을 뗀 곳은 증권사 국제부였다. 해외에서 자금 조달을 필요로 하는 국내 기업들을 지원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이후 국내 증권시장이 외국인에게 개방되면서 국내 증권사들은 앞다퉈 뉴욕 런던 홍콩 등지에 현지법인을 설립했다. 한국 주식에 투자하는 외국인 투자자들을 유치하는 게 주 업무였다.
최근 몇 년간 가장 의미있는 시도는 삼성증권의 홍콩법인과 우리투자증권의 싱가포르법인이었다. 삼성증권은 2009년 홍콩법인에 대해 1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실시해 본격적인 해외 사업을 시작했다. 주 업무도 현지 주식 및 채권 세일즈, 인수·합병(M&A) 자문, 현지 주식시장 기업공개(IPO) 주관 등으로 광범위했다. 그러나 삼성증권의 이 같은 시도는 결국 3년간 약 750억원의 손실을 낸 것으로 끝났다. 작년 2월부터 한국 주식과 채권 중개를 제외한 나머지 업무를 중단했다.
우리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은 우리투자증권이 2008년 자본금 500억원 규모로 설립했다. 홍콩과 더불어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의 격전지 중 하나로 꼽히는 싱가포르에서 현지 기업들을 대상으로 M&A 자문, IPO 주관 등의 업무를 하겠다는 것이 우리투자증권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싱가포르법인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고, 작년 말 조직이 대폭 축소됐다. 삼성증권과 우리투자증권의 실험은 국내 금융투자업계에 해외 진출과 관련해 적잖은 ‘반면교사’의 교훈을 남겼다.
◆해외 사업, 단기수익 연연해선 안 돼
전문가들은 국내 금융투자회사들이 해외 시장에서 성공 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가장 절실한 것은 해외 사업을 ‘장기 투자’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종수 금융투자협회 회장은 “금융투자업의 핵심은 결국 고객 기반을 확보하는 것인데 이는 적잖은 시간이 필요하다”며 “해외 진출도 당장에 수익을 내기보다는 최소 10년은 장기 투자한다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회장은 “삼성증권 홍콩법인도 당장 이익이 나지 않더라도 좀 더 시간을 두고 고객 기반을 차근차근 쌓아나갔으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었다”며 아쉬워했다.
정영채 우리투자증권 IB사업부 대표도 “골드만삭스 같은 글로벌 IB들은 한국에 진출할 때 제일 먼저 사무소를 내고 몇 년 후 이코노미스트를 뽑아 거시경제 상황을 분석한 뒤 ‘투자’라는 무기로 국내에서 제일 똑똑한 애널리스트와 세일즈맨들을 선별 채용해 본격적인 비즈니스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국내 자금, 해외투자 지원 중심 전략 짜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전략을 수립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정태영 대우증권 글로벌사업부문 대표는 “그동안 국내 증권사들의 해외 진출 시도를 보면 어떤 지역에 무엇을 하러 나가는지, 어떤 사업 부문에서 국내 증권사가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이 부족했다”고 평가했다. 정 대표는 “최근 한국 자본시장의 가장 중요한 구조적 변화는 자금을 필요로 하는 시장에서 자금을 공급하는 시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라며 “국내 기업뿐 아니라 기관투자가들이 해외 투자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점에 착안해 금융투자회사들도 해외 진출 전략을 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즉 국민연금 등과 같은 국내 기관투자가들에 필요한 투자 상품을 해외에서 발굴·공급하거나, 이들의 해외 투자 자문을 제공하는 비즈니스를 중심으로 해외 사업 전략을 짤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노무라증권이 글로벌화에 성공한 것도 1980년대 일본 기업과 연기금들의 해외 투자를 지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장은 “한국 금융투자회사들이 해외 시장에서 글로벌 IB에 비해 브랜드가 떨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라며 “이런 점을 감안해 M&A 자문 같은 ‘을의 비즈니스’보다는 자기자본투자나 사모투자펀드(PEF)처럼 자기 돈을 쓰는 ‘갑의 비즈니스’부터 시작해 이를 토대로 사업 영역을 점차 확대해 나가는 단계적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김동윤 기자 oasis9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