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틈만 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극장에 갔다. 학생들의 극장 출입을 단속하던 시절이라 교무실에 붙들려가 반성문을 쓴 적도 있었는데, 그러고도 다시 극장을 찾은 것을 보면 영화 보는 걸 어지간히 좋아했던 게 분명하다. 영화 속 장면이나 대사를 떠올려 혼자 곱씹어 보거나 편지 쓰는 걸 좋아했던 생각도 난다. 아마 그것도 영화보기의 즐거움이었던 것 같다.

지난 주말, 오랜만에 딸과 함께 극장에 갔다. 이미 3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을 잡아끌고 있는, 사랑 용서 구원 희생 희망과 같은 찬사로 감동을 전하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을 보기로 했다. 저마다의 경험과 관심이 다르기에 같은 영화를 보면서도 선명하게 와 닿는 부분은 다를 터, 내게는 마들렌 시장이 된 장발장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그랬다. 자기 대신 체포된, 알지 못하는 사람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죄수 24601’로 돌아갈 것인지, 마들렌 시장으로 계속 살아갈 것인지를 고민하는 장면이다. 그는 자수를 선택하지만 그것은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갈등과 혼란의 끝에서 이뤄진다. 연인 코제트 대신 바리게이트를 선택한 마리우스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다 흔들리며 피어나니’ 동료 의원이기도 한 도종환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국어사전은 이타심을 다른 사람을 위하거나 이롭게 하는 마음이라고 풀이한다. 종종 인간의 이기심을 과장된 목소리로 차갑게 그려내는 것이 눈길을 끌기도 하고, 이타심이라고 하면 어쩐지 성자들의 이야기 같아 때론 촌스럽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실은 끊임없는 흔들림이 있기에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도 피어나는 것은 아닐는지.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누구나 새로운 희망을 계획하는 때. 하지만 ‘비빌 언덕’도 없는 고단한 삶을 사는 이웃들은 희망을 꿈꿀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경제적으로 힘들고 사회적으로 지친 사람들의 새해는 여전히 희망과 체념 사이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레미제라블’이 전하는 감동이 액자 속 사진이 아닌 구체적인 살과 피를 갖는, 살아있는 것이 되기 위해 희망과 체념 사이를 잇는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흔들리며 피는 꽃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서로의 언덕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유은혜 < 민주통합당 국회의원 eun1002@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