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새벽 3시 무렵 서울 여의도 국회. 대기 중이던 기획재정부 예산실 일부 간부들에게 ‘퇴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정부회계연도가 시작된 1일 0시를 넘어서도 예산안의 국회 처리가 안 되자 다음날 사상 초유의 준(準)예산 집행계획을 짜야 할 상황에 대비해 체력을 아껴두라는 얘기였다. 다행히 오전 6시를 넘겨 예산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이번에도 졸속과 밀실심사는 어김없이 되풀이됐다.

쪽지예산 때문에 밤을 샌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예산 처리가 법정시한인 12월 2일 이전에 끝난 적은 2002년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당시 16대 대선을 앞둔 여야가 공식 선거운동 전에 예산심의를 끝내놓자고 합의한 결과였다.

올해 예산안도 당초 여야 원내대표들은 지난해 11월 정기국회가 끝나기 전에 처리하기로 합의를 해둔 상태였다. 하지만 여야가 대선 후보의 공약예산을 서로 반영하겠다고 나서면서 11월은커녕 법정시한도 지키지 못했다. 결국 본격적인 예산심의는 대선이 끝난 12월 21일에야 시작됐다.

지역민원사업을 담은 ‘쪽지예산’이 활개를 친 것도 이때부터였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국회 인근의 호텔에는 여야 예결위 간사와 재정부 예산실장 등 6~7명이 모여 밤샘작업을 벌였다. 쪽지를 주고 받고, 모으고 흩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국회라는 공개 장소를 피한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야 스스로도 떳떳하지 않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여야를 떠나 “서로 뻔히 아는 처지에…”라는 게 의원들의 정서다. 새해 예산안은 이렇게 서로 챙겨주는 ‘정치적 품앗이’를 거쳐 불과 열흘여 만에 급조됐다. 사업 타당성에 대한 진지한 논의는 생략하고, 수천 건이 넘는 민원성 사업을 잘라서 넣기에 급급했다. 정부도 관행화된 쪽지예산에 대응하기 위해 편성 단계에서 2조~3조원의 여윳돈을 마련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전에 ‘삭감재원’을 미리 얹어 놓은 것이다. 대표적인 게 예비비다. 올해도 6000억원이 깎였다.

대통령 선거가 없는 해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정감사가 끝나는 10월 말에 심의를 시작하면 실제 법정 기한인 12월 2일까지는 시간이 한 달 정도밖에 없다. 이 기간 동안 3만6000개가 넘는 행정부의 사업을 심사해서 가려내야 한다. 쪽지예산까지 밀고 당기려면 한 달이라는 기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이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의원들은 정부의 예산안 국회 제출 기한을 회기시작 90일 전(매년 10월 2일)에서 30일을 더 앞당기도록 하는 내용의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지난해 7월 발의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논의 한 번 없이 상임위에 계류 중이다.

마음대로 돈 뜯어내는 정치권

정부도 한 달이나 예산안 제출시기를 앞당기는 것에 반대한다. 정확한 세수 전망이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대신 10월에 시작하는 국정감사를 상반기인 4월이나 6월로 조정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예산심의 기간을 90일에서 120일로 늘린다고 해서 예산심의가 제대로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예산실의 한 관계자는 “심사기간이 길어질수록 쪽지예산만 늘어날 뿐”이라며 “차라리 지금처럼 며칠 밤을 새워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처리하는 편이 낫다”고 말했다.

예산은 숫자로 표현된 정책이자, 우선순위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칼자루를 쥔 정치권이 행정부를 국회 밖으로 불러내 윽박지르듯 수천억원을 뜯어내는 것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지 답답할 뿐이다.

이심기 경제부 차장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