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들의 절반 가량은 연말휴가도 못 갔어요.” 미국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주 레스턴의 한 정보기술(IT) 회사에 다니는 짐 모젤리 씨는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재정절벽이 코 앞에 닥쳤는데도 민주당과 공화당이 자기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새해부터 세금 인상과 정부의 재정지출 삭감이 동시에 이뤄지는 ‘재정절벽’이 현실화되면 모젤리 씨도 충격을 피할 수 없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국방부 등 연방정부가 주요 거래처다. 재정지출이 급감하는 만큼 정부의 발주 물량이 줄어든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연말휴가도 제대로 가지 못했다”는 게 빈말은 아니다.

지난 11월 대통령 선거 이후 본격 시작된 미국 정치권의 재정절벽 타개 협상은 이달 중순 접점을 찾는 듯했다. 최대 걸림돌인 ‘부자 증세’에 양측이 한 발씩 양보했다. ‘부자증세는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해 온 공화당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이 증세 기준을 ‘연소득 100만달러 이상’으로 제한하자며 한발 물러섰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증세 기준을 25만달러(부부 합산) 이상에서 40만달러 이상으로 올리겠다며 타협안을 내밀었다.

베이너가 양보한 데는 명분이 있었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53%가 “재정절벽 협상이 실패할 경우 공화당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응답했다. 공화당 협상대표인 베이너가 당론을 접고 오바마의 기세와 여론에 굴복한 모양새였다. 보수성향 싱크탱크들은 공화당이 ‘세금인상 반대’ 강령을 내리고 ‘좌(左)클릭’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런 베이너의 부자증세안(플랜B)을 무산시킨 것은 공화당 의원들이었다. 상당수 의원들이 “부자증세는 경제와 일자리를 죽이는 일”이라고 반대했다. “베이너가 당을 제대로 대변하는지 의문”이라는 비판도 나왔다. 베이너는 즉각 “당 내 의원들의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며 플랜B안 표결처리를 취소했다. 여론에 휘둘렸던 베이너가 보수당의 ‘원칙’으로 회귀한 것이다.

재정절벽 협상은 다시 교착상태에 빠져들었지만, 대선에서 지고도 증세 반대라는 당의 정체성과 보수의 원칙을 끝까지 지키려는 공화당의 모습은 새롭게 보였다. 대선 승리에 집착해 경제민주화와 복지확대 공약을 쏟아내며 좌클릭한 한국의 새누리당과는 분명 다르게 다가왔다.

장진모 워싱턴 특파원 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