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의 기술 표준 격차를 줄이지 않으면 통일 후 표준 통합에만 수십조원이 들어갈 겁니다. 이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단계적으로 준비에 나서야 합니다.”

한국경제신문이 최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등과 한양대 한양종합기술연구원(HIT)에서 공동 주최한 ‘컴퓨터 자판조차 다른 남북, 통일 대비 표준 정비 시급하다’ 좌담회에서는 남북이 전력, 철도, 에너지, 정보기술(IT)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 표준 차이를 줄여 나가지 않으면 통일 이후 막대한 경제적 부담을 안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쏟아졌다.

좌담회에는 강대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이하 가나다 순), 김도연 국가과학기술위원장, 김호용 한국전기연구원장, 박완기 LS전선연구소장(전무), 양영명 한국가스공사 연구개발원장, 이은정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연구소장이 참석했다. 사회는 남궁덕 한국경제신문 중기과학부장이 맡았다.

▷사회=남북한의 표준 차이는 어느 정도인가.

▷박완기 전무=심각한 수준이다. 철도의 경우 남북한 철도 연결 작업을 현재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린 2만5000V 교류 전압을 사용하는 반면 북한은 3000V 직류를 사용한다. 기관차의 신호제어 방식도 달라 물리적으로 단절된 철도가 연결된다고 하더라도 전기기관차 운행은 불가능하다.

▷김호용 원장=가정에서 사용하는 배전전압은 220V로 같다. 하지만 발전소에서 철탑을 통해 개별 변전소로 보내는 송전전압이 크게 다르다. 이 때문에 북한으로 전기를 보내려면 별도의 변전시설이 필요하다. 추가 비용을 줄이기 위해선 송전전압 통일이 시급한 상황이다.

▷사회=통일 후 남북간 표준 차이로 인해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나.

▷강대임 원장=인력손실, 자재손실 등의 문제 외에 생산성이 떨어지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남북한의 경제 성장 동력을 마련하기 위해선 북한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표준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국제적 수준에 부합하는 표준 보급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는 우리 기업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자생력을 키우고 생산성을 높이는 데 꼭 필요한 일이다.

▷사회=독일은 통일 후 표준을 통합하는 데 180조원을 썼다는 분석이 있다. 남북 통일에는 얼마나 많은 비용이 예상되나.

▷김도연 위원장=한국표준협회가 2002년 내놓은 보고서에서는 15조~200조원을 전망했다. 인력손실(3~4%), 자재손실(2~3%), 생산성 저하(3~10%) 등 표준 불일치로 인해 전체적으로 통일 비용의 8~17%가 표준 통합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10년 전 전망치다. 세월이 흐른 만큼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갈 수 있다.

▷양영명 원장=독일은 통일 이전에 상당한 교류가 있었지만 우리는 북한과 오랜 시간 단절됐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가스 분야에선 표준 통일을 위한 연구 비용에만 수천억원이 필요하다. 설비 투자에는 이 비용의 수십배를 투자해야 할 것이다.

▷사회=남북 표준 협력과 관련해 그동안 정부와 민간에서 어떤 준비를 해왔는가.

▷이은정 교수=수차례에 걸쳐 남북간 표준 문제에 관한 회합이 있었다. 2003년엔 남북이 공동으로 정보통신 분야의 표준 용어를 만들기로 하는 등 실질적인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다. 북한 당국이 체제에 대한 위협 때문에 표준 협력에 소극적이다.

▷박 전무=그동안 북한의 기술 표준을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어 일정 범위 내에서만 연구를 진행해야 했다. 이젠 수동적·소극적인 표준 협력 방식에서 벗어나 민간 주도의 기술표준협력단을 발족해야 한다. 이를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기술 표준 선도 사례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김 위원장=독일 통일 이후 20년간 세계는 국제화의 변화를 겪었다. 지금은 표준이라는 게 국제적인 의미다. 앞으로 추진할 남북 표준 협력 방향도 양국 표준을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 표준에 맞추는 식으로 가야 한다.

▷사회=남북간 정치적 상황에 따라 표준 협력도 부침을 겪었다. 북한의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하는가.

▷강 원장=국제기구를 통한 협력이 필요하다. 북한은 체제가 불안정해질 것을 우려해 표준 협력을 주저하지만 국제적인 흐름에는 관심을 갖고 있다. 국제표준화기구(ISO), 국제도량형국(BIPM) 등 국제기구를 통해 북한의 협력을 끌어내는 등 다양한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김 원장=전기 분야 협력을 위해서는 남북에너지협력위원회와 같은 남북한 공동 협력기구를 설립할 필요가 있다. 배전망 표준화사업부터 시작해 발전단지 및 기타 에너지 협력사업 등 단계적으로 협력 범위를 넓혀 나가야 한다.

▷이 교수=개성공단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남북이 만나는 접점인 이곳에서 표준 격차를 줄이는 논의를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한다.

▷강 원장=시간 표준에 오차가 생기면 통신망이 마비될 수도 있는데 현재 북한 시간은 국제적으로 인증받지 못하고 있다. 비무장지대에 장파방송국을 설치하면 반경 1000㎞까지 시간 표준을 송출할 수 있다. 북한이 이를 무료로 받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표준을 통합하는 효과를 낼 수 있다.

▷김 위원장=국가 과학기술 기본계획을 5년 주기로 만드는데 내년 시행할 다음 기본 계획에 통일에 대비한 과학기술 연구를 처음으로 넣을 계획이다. 연구·개발(R&D) 예산 일부를 이제라도 통일을 준비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앞으로 개성공단 등 남북 협력이 가능한 범위에서 정부 출연연구소들이 R&D를 통해 통일 충격을 완화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해줘야 한다.

사회=남궁덕 중기과학부장

정리=김태훈/김희경 기자 hkkim@hankyung.com

■ 참석자 (가나다순)

강대임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김도연 국가과학기술위원장
김호용 한국전기연구원장
박완기 LS전선 시스템에너지연구소장
양영명 가스공사 연구개발원장
이은정 베를린자유대학 한국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