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사랑의 정표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머물 때 정을 나누던 여인이 있었다. 헤어질 날이 오자 여인은 왕의 소매를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충선왕은 사랑의 정표로 연꽃을 하나 꺾어 준다. 그리고 귀국 후에도 여인을 잊지 못하고 심복 이제현을 연경에 보내 안부를 전한다. 이제현을 만난 여인은 붓을 들어 시를 한 편 써 건넨다. ‘떠나며 주신 연꽃 한 송이/ 처음에는 참 붉었답니다/ 줄기를 떠난 지 며칠이 못 되어/ 초췌한 모습 저를 닮았습니다…’ 낭만과 품격이 깃든 정표다.

‘배비장전’에 등장하는 기생 애랑은 배비장의 전임자인 정비장과 헤어지면서 앞니를 하나 뽑아달라고 청한다. 손수건에 고이 싸서 백옥함에 넣어두고 당신을 그리며 꺼내 보겠다는 말에 정비장은 어쩔 수 없이 생이빨을 뽑아 준다. 여색을 삼가라는 교훈이 담긴 ‘발치설화(拔齒說話)’의 전형이다. 그 후에도 화류계에서는 사랑의 정표로 이빨이 자주 사용된다. 점잖기로 소문난 육당 최남선의 자전적 기록에도 일제강점기 장안의 기생들은 한량들이 뽑아준 이빨을 화장대 속에 모아두고 한 번씩 꺼내보며 추억에 잠겼다는 대목이 나온다.

요즘 연인들 사이에 정표로 많이 주고받는 건 커플 반지다. 두 사람의 이니셜이 새겨진 반지를 끼고 다니며 ‘절대 헤어지지 말자’는 약속을 상기하자는 의미다. 얼마 전엔 빈틈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나 볼트·너트 모양의 ‘공대생이 만든 커플 반지’가 유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상징적 정표야 모르지만 돈이 개입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2007년 서울중앙지법은 사랑의 정표로 주고받은 약속어음은 무효라는 판결을 내렸다. 20대 후반 남자가 여자친구에게 ‘끝까지 사귀겠다’는 조건으로 써준 5000만원짜리 약속어음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결정이었다.

이른바 ‘벤츠 여검사’ 사건 항소심에서 부산고법 형사1부가 전직 여검사 이모씨에 대한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하자 논란이 일고 있다. 이씨가 검사 시절 내연남 변호사로부터 받은 벤츠 승용차와 명품 가방 등이 청탁 대가가 아닌 사랑의 정표라는 판단이지만 국민 법 감정과 동떨어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높은 도덕성이 요구되는 검사의 부적절한 처신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판결이 아니냐는 얘기다. 1심에서는 징역 3년에 추징금 4462만원이 선고됐었다.

이씨가 받은 선물목록에는 승용차와 가방 외에도 40평형 전세아파트, 3000만원 다이아반지, 2650만원 시계, 1200만원 모피코트 등이 포함됐다는 얘기도 들린다. 두 사람 간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정표치고는 너무 요란하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