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차가운 詩語로 세상을 뜨겁게 껴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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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새 시집 '갈라진다…'
현대문학상과 미당문학상 등 굵직한 상을 받은 시인 김기택 씨(55·사진)는 새 시집 《갈라진다 갈라진다》(문학과지성사)에서 한 시인의 죽음에 대해 썼다. 그 시인은 앞좌석에 앉아 있었고 버스가 가드레일을 들이받자 앞유리를 깨고 튕겨나갔다.
시인은 묻는다. “왜 그는 그 시간에 아프리카나 인도에 있지 않았는가. 왜 그 많은 좌석을 두고 앞좌석에 앉았는가. 이 특별하고 고유한 죽음은 그의 얼굴에 달린 코와 입처럼 애초에 그의 몸에 달려 있던 것인가.”
이번 시집에서 그는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비극적 모습들을 보여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은 교통사고를 당한 시인의 죽음처럼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일과 사회의 괴기스러운 단면들이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담담한 어조가 오히려 깊은 울림을 준다. 또 이를 통해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세계를 넘어서는 초월적 상상으로 우리를 이끈다.
‘불이 살을 녹여 얼굴을 지우고/손가락 발가락을 지우고/병원이/녹은 얼굴에 두 개의 구멍을 뚫어/호흡만 겨우 이어놓았다/(…)/익어버린 혀가 침묵하는 동안/신음은 컴컴한 바람 소리의 힘으로/간신히 발음 하나를 만들었다/할여으에어/(…)/살려주세요’(‘할여으에어’ 중)
‘목이 힘껏/천장에 매달아 놓은 넥타이를 잡아당긴다/공중에 들린 발바닥이 날개처럼 세차게 파닥거린다’(‘넥타이’ 중)
시인은 일상적인 삶의 모순을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한다. 그에게 세상의 아이러니는 손톱을 깎는 일이나 보험 가입과 같은 일상을 통해 드러난다. 아무리 잘라내도 ‘잠깐 전화받고 나서 보면’ 한 번도 안 깎은 것처럼 자라 있는 손톱. 그는 손톱이 다시 자라는 며칠의 시간을 촌음(寸陰)으로 느끼게 되는 현대인을 발견한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손톱 자라는 속도를 쫓아갈 수 없다/손톱 자라는 속도에 맞추느라/(…)/신호등마다 정류장마다 서는 답답한 속도에 화를 내며/택시로 갈아탄다’(‘손톱’ 중)
생명보험을 통해서는 ‘죽음에 투자하는’ 아이로니컬한 현실을 포착해낸다.
‘공짜였던 죽음이 언제부터 선불로 바뀌었나요?/선불이 아니라, 아버님, 가족에 대한 사랑이에요./보장성과 수익성이 풍부한 사랑이요./사랑이 얼마나 진실한지 견적 뽑으면 다 나와요./죽음에다 돈과 사랑이 쏟아져 나오는 투자를 하고 나면/어서 죽고 싶어 온몸이 근질근질해질 거예요.’(‘생명보험’ 중)
그는 “죄송하지만 또 시집을 낸다. 시 쓰는 일 말고는 달리 취미도 재주도 할 일도 없는 뛰어난 무능력과 앞뒤 못 가리는 성실성 탓”이라며 겸손해했지만, 그의 시는 사고와 죽음 등 일상적 위험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더없이 소중한 위로다.
박한신 기자 han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