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 적합 업종으로 지정돼 국내 대기업들이 밀려난 자리에 다국적 기업이 몰려들고 있다. 국내 중소기업 보호를 위해 취한 조치가 규제를 받지 않는 외국계 대기업에 한국시장을 손쉽게 넓히는 기회가 돼버렸다.

○급식, MRO 외국계 점령 가속화

이만우 새누리당 의원에 따르면 조달청은 지난해 11월 미국계 사무용품 업체 오피스디포와 사인펜, 메모지, 노트, 전산소모품 등에 대한 MRO(소모성자재 구매대행) 계약을 맺었다. 계약금액은 80억원으로 공공 MRO 시장의 80%에 이른다. 올 8월까지 18억1000만원어치를 납품한 오피스디포는 세계 60개국에서 지난해 매출 115억달러(약 12조8000억원)를 올렸다.

조달청이 동반성장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가이드라인(대기업 MRO의 확장 제한)에 따라 대기업을 배제한 채 중소기업을 상대로 실시한 지역별 입찰에서 오피스디포가 낙찰돼서다. 오피스디포는 지역별 가맹점들과 컨소시엄을 구성, 전국 10개 권역 중 6개 권역(부산 인천 광주 강원 충북 경남)에서 입찰에 성공했다. 본사가 아닌 가맹점 명의로 나서 중소기업으로 인정됐다. 조달청은 지난해까지 삼성 계열의 아이마켓코리아, LG 계열 서브원 등을 통해 물품을 조달해왔다.

정영태 동반위 사무총장은 “MRO 가이드라인 설정으로 중소 MRO 기업이 도움을 받고 있는 게 사실”이라고 전제한 뒤 “일부 외국계 MRO가 대기업이 빠진 자리에 들어오는지에 대해선 상세한 시장 분석과 조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급식시장에서는 세계 3위 급식업체인 아라마크가 약진하고 있다. 기획재정부가 ‘공공기관 구내식당 중소 급식업체 참여 확대’ 지침을 내린 뒤 지난 3월 이후 부쳐진 입찰에서 서울시 다산콜센터, 국립환경과학원, 신용보증기금, 전북테크노파크 등 4곳의 운영권을 아라코가 가져갔다. 이 회사는 연간 매출 14조원, 전 세계 22개국에서 26만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아라마크의 한국 법인이다.

기업형 슈퍼마켓(SSM)에서도 국내 대기업이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라 영업시간과 출점 규제를 받고 있는 사이 일본계 SSM이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일본계 ‘트라박스’는 해운대에 이어 경남 함안, 전남 광양 등 10곳에 점포를 열었고 다른 일본계인 ‘바로’도 올 5월 부산과 경남 김해에 점포를 개설했다.

라구람 라잔 시카고대 부스경영대학원 교수는 지난 6월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대기업이 해당 업종을 포기한다고 해도 경쟁력 있는 외국 업체가 관련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며 “대기업 규제보다는 중소기업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SI 등 업종은 계속 확대되고…

대기업 손발을 묶는 일은 이제 시작이다. 정보기술(IT) 서비스 시장에서도 내년 1월부터 공공기관 사업에 대기업 참여가 제한된다. 소프트웨어산업진흥법 개정안이 지난 4월 국회를 통과해서다. 삼성SDS, LG CNS, SK C&C 등 55개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속하는 IT서비스 기업은 사업금액에 관계없이 공공기관 사업 참여가 제한된다.

업계에선 “대규모 사업을 할 수 있는 중소기업이 없어 다국적 기업만 좋아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AT커니가 경영권을 가진 대우정보시스템은 공공 IT서비스 조직을 확대했다. 전사적으로 공공정보화시장 교육을 실시 중인 쌍용정보통신의 최대주주는 일본 태평양시멘트다. IBM, 액센츄어 등도 조직을 확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중앙회가 주도하는 ‘중소기업자 간 경쟁제품’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등이 하고 있는 데스크톱PC, 프린터 토너 등이 지정될 가능성이 높다. 중소기업자 간 경쟁제품으로 지정되면 공공기관이 조달계약을 맺을 때 해당제품을 만드는 중소기업자만 참여할 수 있다.

대기업 관계자는 “중소기업은 대부분 조립 업체일 뿐”이라며 “대기업의 PC 공공시장 진출을 막으면 메모리, 디스플레이, 하드디스크, 메인보드, 전원장치 등 중요 부품에 대한 연구·개발이 침체돼 관련 산업 전반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토너카트리지의 경우도 세계 프린터 시장에서 국내 대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현석/이정호/김보영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