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문제는 접어둡시다. 그러면 다음 세대가 더 총명해 실질적인 해결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1978년 중국·일본 우호조약체결 직후 당시 국무원 부총리이던 덩샤오핑((鄧小平)은 기자회견에서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문제와 관련해 이같이 말했다. 안타깝게도 덩샤오핑의 기대는 빗나갔다. 34년이 흐른 2012년 9월 센카쿠열도는 일본의 국유화 조치 이후 촉발된 중국과 일본 간 영유권 분쟁으로 세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센카쿠열도는 1895년 청ㆍ일전쟁 승리로 대만과 부속도서를 청나라로부터 넘겨받으면서 일본에 복속됐다. 2차 세계대전 패배로 대만 등 대부분의 옛 청나라 영토가 중국에 반환됐지만 센카쿠열도는 미군의 통제하에 놓였다 그대로 일본에 남게 됐다.

중국은 명나라 영락제 원년(1403년) 이후 600여년간 축적된 역사 문헌을 근거로 센카쿠열도 영유권을 주장한다. 1945년 포츠담선언 등을 통해 일본이 강점했던 기존 중국 영토를 모두 반환하기로 원칙을 정한 만큼 늦었지만 센카쿠열도도 돌려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센카쿠열도에서 나타난 중·일 양국의 대립은 각국의 영토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문헌을 근거로 한 영유권 주장은 1949년 건국 이후 중국 영토분쟁의 일관된 흐름이다. 일본의 센카쿠열도 복속은 19세기 이후 이어져온 무인도 점유 정책의 연장선에 있다. 중국과 일본 간 영토분쟁의 기원은 언제, 어디서부터일까.

◆19세기부터 무인도 깃발꽂은 일본

뒤늦게 해양영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한국 및 중국과 달리 일본은 19세기부터 동아시아 해역의 무인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며 해양영토를 확장해왔다. 이런 확장 전략이 이전의 역사적 사실과 충돌하면서 여기저기서 불협화음을 낳고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 단행된 1876년, 도쿄에서 1000㎞ 떨어진 오가사와라 제도를 정식 편입시켰다. 당시까지 무인도였던 오가사와라를 점유하려는 미국에 맞선 결과였다. 1879년에는 오키나와를 강제 병합했다. 일본 영토의 최동단으로 일본 열도에서 1800㎞ 떨어져 있는 마니미토리시마도 1896년 편입된 무인도다. 1905년 독도 편입도 같은 맥락에서 이뤄졌다.

해양영토에 대한 문제의식은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국학자인 하야시 시헤이는 “해상방위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주변 무인도를 병합해야 한다”며 오가사와라 편입의 근거가 된 일본 해역도를 1875년 편찬했다.

이에 따라 일본은 대륙침략과는 별개로 서태평양 일대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을 일찍부터 설정했다. 해양 진출론을 적극적으로 펼친 학자 시가 시게코는 1887년 “일본은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아 등을 마주하고 호주를 가까이 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류교열 국제해양문제연구소 국제지역연구실장은 “1980년대 일본의 환태평양 구상과 최근의 해양국가 구상은 모두 연원이 메이지유신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며 “주로 섬을 중심으로 일본이 주변국과 영토분쟁을 벌이는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고토(古土) 회복 부르짖어온 중국

중국의 영토분쟁도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 역사문헌을 기반으로 다른 나라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에 영유권을 주장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력행사를 하는 방식이다.

1962년 인도와의 국경전쟁이 첫 번째 사례다. 중국은 청나라 당시 점유사실을 근거로 인도 북동부 라다크 지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다. 1969년에도 중국은 청나라 당시의 판도를 근거로 옛소련에 일부 영토 반환을 요구했다. 옛소련이 이를 거절하자 헤이룽장성과 신장위구르자치구 등의 옛소련 접경지에서 무력충돌을 벌였다. 중국이 필리핀에 맞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스프래틀리제도(중국명 난사군도) 역시 영유권 근거는 후한시대(22~220년) 기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전문가들은 영토분쟁의 특수성을 19세기 서구열강의 침략 이후 형성된 중국의 ‘피해의식’에서 찾는다. 이지용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는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자국의 국토가 외세에 유린됐다는 피해의식이 있다”며 “다른 나라가 보기에는 억지를 부리는 듯한 영토분쟁도 중국 입장에서는 과거에 빼앗긴 땅을 찾아온다는 점에서 정당화된다”고 설명했다.

중국은 왕조의 흥망을 거듭하며 몽골과 베트남, 러시아 연해주까지 판도에 넣었던 적이 있는 만큼 중국의 주장을 근거로 하면 인접국 대부분이 영토분쟁의 대상이 된다. 실제 중국은 국내외 정치 상황에 따라 이들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도 했다.

◆중·일 아닌 중·미 문제?

중국은 영토분쟁과 관련해 상대의 국력이 강할수록 강경책을 펼쳤다. 센카쿠열도 문제 역시 단순히 일본과의 분쟁이라기보다는 버락 오바마 정부 출범 이후 동아시아 회귀를 선언한 미국을 견제하려는 시도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동률 동덕여대 중국학과 교수는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중국은 영토분쟁 과정에서 강자에는 강경론을 펼친 반면 군소국가에는 온건하게 대했다”며 “냉전시기 공산주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던 옛소련과는 무력충돌까지 불사한 반면 부탄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국토를 일부 양보한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1962년 인도와의 국경전쟁도 인도 배후의 옛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감행해 승리했지만 이후 중국군은 점령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했다.

올 들어 벌어진 스프래틀리제도, 센카쿠열도 관련 분쟁도 이 같은 전략의 연장선이라는 분석이다. 이 교수는 “미국이 동아시아에 관심을 확대하고 있는 만큼 일본과 필리핀은 이를 최대한 활용하자는 방침인 반면 중국은 여기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고 분석했다. 류교열 실장도 “중국의 해양 진출을 봉쇄하려는 목적으로 미국이 동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면서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국가 간 자원 확보 경쟁도 양국의 영유권 분쟁을 가열시키고 있다는 지적이다. 5개의 섬과 3개의 암초로 이뤄진 센카쿠열도의 해역에는 풍부한 어족자원뿐만 아니라 해저에는 흑해 유전의 추정 매장량과 비슷한 70억t의 석유가 매장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5년 10월 중국의 한 언론은 약 945억배럴에 달하는 원유가 센카쿠열도 대륙붕에 매장돼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 실효지배

effective control. 국가의 입법 및 사법, 행정권을 동원해 영토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나라와 다툼이 없는 ‘평온성’, 누구나 알 수 있는 ‘공개성’, 중단 없는 ‘계속성’ 등의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국제적으로 특정 지역에 대한 해당 국가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근거가 된다. 분쟁 발생시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실효적 지배 여부를 근거로 영유권 판결을 하게 된다. 일본 민간인이 소유하던 센카쿠열도를 최근 일본 정부가 매입, 국유화한 것이나 일본 순시선이 이 해역에서 중국 어선을 나포하는 등 사법권을 집행하는 것도 실효적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