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 영향을 주는 태풍의 고향은 대개 북위 20도 부근 태평양 해상이다. 한 해 평균 27~28개꼴로 발생한다. 1967년엔 39개나 됐지만 2010년에는 14개에 불과했다. 그 중 우리나라로 향하는 건 2~3개 정도다.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나름대로 진행하는 패턴이 있다. 북서쪽으로 향하다가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포물선 진로를 자주 보인다. 북태평양 고기압을 침범하지 못한 채 그 가장자리를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태풍의 영어 ‘타이푼(typhoo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 ‘티폰(Typhon)’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와 암흑의 신 타르타루스 사이에서 태어난 티폰은 난폭한 파괴자였다. 백마리 뱀의 머리를 가지고 불을 내뿜을 수 있었지만 제우스신에게 폭풍우 이외의 능력을 빼앗겼다. 티폰의 파괴 본능과 폭풍우를 연관시켜 타이푼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중국 남부에서 강한 바람을 뜻하는 ‘타이후’가 서양의 티폰과 결합, 타이푼이 돼 동양으로 역수입됐다는 설도 있다.

태풍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것은 1953년부터다. 처음엔 여자 이름만 썼다. 여성처럼 온순해지라는 희망에서였다. 각국 여성단체들이 남녀차별이라며 발끈하고 나서자 1978년부터는 남녀 이름을 번갈아 사용하게 됐다. 요즘엔 아시아태풍위원회 14개 회원국이 10개씩 추천한 이름을 차례로 붙인다. 태풍은 대기의 난폭자로 불리지만 피해만 주는 건 아니다. 바다 밑을 뒤집어 적조 현상을 없애고 어족 자원을 풍부하게 한다. 대기 오염물질도 쓸어간다. 식물 씨앗은 물론 새나 조개, 해파리류도 이동시켜 생물 다양성을 높여 주기도 한다.

우리나라에는 8월 태풍이 가장 많다. 1904~2011년 8월에 온 것이 124차례다. 하지만 9월에 내습한 ‘가을 태풍’도 81차례나 된다. 가을 태풍은 유독 사납다. 한여름을 지난 9월의 바닷물 온도가 가장 높아 태풍의 에너지도 그만큼 증가하는 탓이다. 1959년 한반도를 할퀴고 지나가며 사망·실종 849명, 이재민 37만여명 등 엄청난 피해를 낸 ‘사라’도 9월에 발생했다. 5조1000억원의 재산을 쓸어간 ‘루사’(2002년), 131명의 인명과 4조2225억원의 재산피해를 낸 ‘매미’(2003년) 역시 가을에 왔다.

어제 또 하나의 가을 태풍 ‘산바’가 한반도를 강타했다. 남해안 상륙 당시 기압이 965헥토파스칼로 루사, 매미와 맞먹는 위력을 지녔었다고 한다. 기반시설을 개선하고 나름대로 대비를 하는 덕에 피해는 줄어드는 추세지만 태풍은 여전히 무섭다. 더구나 지구 온난화로 가을 태풍은 더 빈번해질 것이란다. 티폰의 파괴 본능을 근절하지 않은 제우스신을 원망해야 하나.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