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니, 여름은 날마다 들쭉날쭉 덥고 따분했다. 추분이 가까워지며 물은 차갑고 벽옥같이 푸르러지니 따분함이 돌연 즐거움으로 바뀐들 이상한 게 아니다. 감나무 잎이 노래지고 가시를 세운 밤송이가 품은 밤들은 여문다. 호박벌은 한낮을 호기롭게 잉잉대고, 헛간 그늘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감자들 몸통에는 뿔이 돋는다. 밤숲에서는 매끈하게 여문 밤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본색을 드러내며 툭툭 땅으로 낙하한다. 그 사이 민물에 사는 참게들은 살이 오르고 덩달아 세상의 고요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 가을이 화창해지자 물렁물렁한 정신들은 얼른 야무진 본래 면목으로 쇄신됐다. 국민건강보험료도 면제받는 고요가 최저생계비로 부양하는 오솔길과 언덕들, 그리고 풀숲 풀벌레 소리, 섬돌 아래 귀뚜라미 소리에도 살이 올라 실팍해진다. 다들 살이 오르는데 마른 것은 홀쭉해진 가을의 초승달과 나 둘의 내밀한 살림뿐이다. 그래도 괜찮다. 마음 속 강물은 여전히 노래하며 흐르고, 때는 가을이니까! 서리와 서리 위에 찍히는 발자국들도 아직은 가을의 날들에 발을 못 붙인다.

살아오며 늘 가난을 염려했으나 이제는 염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답(上畓) 같은 가난을 사랑하고 누리고자 한다. 오늘날 가난은 고결한 시인이나 욕심내는 품목이다. “오늘 나는 가난해야겠다/그러나 가난이 어디 있기나 한가/그저 황혼의 전봇대 그림자가 길고 길 뿐/사납던 이웃집 개도 오늘 하루는 얌전했을 뿐”(장석남, ‘가난을 모시고’) 사랑하고 누리고자 하는 가난은 가난 중에서도 가장 깨끗한 것, 곧 청빈(淸貧)이다. 청빈은 비우고 버린 뒤에 비로소 남은 마음의 여백, 그 공(空)의 자리를 소슬함으로 채운다. 옛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삶의 자연스러운 목적으로 단련된 가난은 커다란 재산이라고 했다. 옳거니, 청빈은 희귀한 재산! 가난은 심플하게 사는 것과 즐거운 한 통속이다. 그 즐거움을 가지려면 버리고 비워서 심플해져야 한다. 심플은 내적 가난이 구현하는 아름다운 표면이다. 일체의 잉여를 허락하지 않는 벌집의 건축 공학(工學)을 보라! 벌집은 단순함의 극치로 세상의 모든 잉여를 추문으로 만든다. 많은 물건들을 지니고 사는 것은 단순함의 견실한 아름다움을 일그러뜨린다. 결국은 물건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물건에 소유당한다. 물건에 소유당한 자아는 수동화되면서 본질에서도 차츰 멀어진다.

어쩌다 가을의 비는 지팡이로 땅들을 두드리며 온다. 그때 빗소리는 허공을 장악한 적막의 깊이를 측량하느라 모처럼 분주하다. 그것은 가을의 빗소리가 할 일. 나는 멸치 우린 국물에 만 국수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우고 ‘백거이 한적시선’을 뒤적거린다. 그것만이 내 몫의 한가로운 과업. 문득 빗소리로 허리가 서늘해지면 아궁이에 불을 지펴 아랫목 구들을 달궈 등을 지진다. 뜨끈하게 등을 지지며 저물 무렵 횃대에 오르는 닭들의 푸드덕거림에나 귀를 기울인다. 이게 심플 생활의 표본이다. 즐거움은 심플한 생활방식, 가볍게 사는 것에 주어지는 선물이요 응답이다. “필요한 최소한 물건보다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은 곧 새로운 불행을 짊어지는 것이다.”(도미니크 로로, 《심플하게 산다》) 단순함으로 단련된 사람은 과잉 소유가 자기 패배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불행해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니 불행의 짐을 지지 않으려면 물건들은 꼭 필요한 것만 소유하자. 언젠가 써먹을 물건들은 영원히 써먹지 못할 물건들이다. 애초에 원하지 않은 물건들은 집에 들이지 말아야 한다. 물건들이 많아지면 본질은 협소해지고 물건들의 무게가 더해져서 사는 게 뻑뻑하고 무거워진다. 뻑뻑해지면 몸에서 활력이 떠나고 우환이 들이닥친다. 만사의 괴로움은 울퉁불퉁한데, 그 울퉁불퉁으로 절학무우(絶學無憂)의 날들을 집어삼키고 물건들이 너절하게 널린 생활 속에서 우환의 너비를 키운다. 어리석고 어리석다. 살림은 심플하게, 생각은 고매하게! 적은 것이 많은 것이고 심플하게 사는 것이 진짜 풍요롭게 사는 것이다.

장석주 < 시인 kafkajs@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