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정크 D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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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20세기 생물학 최대 업적의 하나로 꼽히는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의 공동논문 ‘디옥시리보 핵산의 구조’는 900단어밖에 안됐다. 1953년 4월 ‘네이처’지에 실렸으나 에드먼드 힐러리가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직후였던 데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즉위 직전이어서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DNA의 이중나선(二重螺旋) 구조를 설명한 그 짤막한 논문은 생명 현상을 이해하는 핵심을 담았고, 이후 유전공학과 생명공학 시대를 여는 기폭제가 됐다.
인간 DNA를 늘어 놓으면 대략 2m라고 한다. 여기에 들어 있는 염기(鹽基) 수는 32억개나 된다. 1990년에는 수천 명의 학자가 참여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인체의 설계도 격인 게놈(genome)을 해독해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고 유전자 배열을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10여년 후 DNA 속 32억개 염기 전체에 대한 게놈구조를 구명하는 데 성공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흥분해서 “신이 생명을 만들 때 사용한 언어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당시 모든 사람은 99.9% 이상 동일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으며, 0.1% 미만의 차이가 종족 외모 같은 ‘구분’을 만들어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32억개 염기 중 유전자로 작용하는 것은 대략 2%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나머지 98%는 별다른 기능을 하지 않는 ‘정크(쓰레기) DNA’로 불렸다. 인간 진화 과정에서 퇴화해 기능은 없어지고 DNA 2중 나선 구조에 자리만 잡고 있다는 추정이었다.
하지만 ‘정크 DNA’의 80% 정도가 암 심장병 정신질환 등 각종 질병과 돌연변이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국제공동연구로 밝혀졌다. 미국 영국 일본 싱가포르 등 32개 연구소의 과학자 442명이 참여한 ‘DNA백과사전’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2003년 인간 게놈 지도가 처음 그려진 지 10년 만에 세밀지도가 완성됐다는 뜻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대 백과사전의 글자 나열방식만 알았을 뿐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 낱낱이 해독해내지는 못했다는 거다. 어떤 학자는 “10만개의 부품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해서 보잉기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개인 유전정보 공개로 인한 윤리적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 해도 게놈의 세밀지도를 활용하면 각종 난치병과 유전 질환의 발병 원인을 밝혀내고, 맞춤 신약 시대도 앞당길 수 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진화생물학 연구에도 기여할 게 틀림없다. 더디지만 인간 생명의 비밀은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인간 DNA를 늘어 놓으면 대략 2m라고 한다. 여기에 들어 있는 염기(鹽基) 수는 32억개나 된다. 1990년에는 수천 명의 학자가 참여한 ‘인간 게놈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인체의 설계도 격인 게놈(genome)을 해독해 유전자 지도를 작성하고 유전자 배열을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10여년 후 DNA 속 32억개 염기 전체에 대한 게놈구조를 구명하는 데 성공했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흥분해서 “신이 생명을 만들 때 사용한 언어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당시 모든 사람은 99.9% 이상 동일한 유전정보를 갖고 있으며, 0.1% 미만의 차이가 종족 외모 같은 ‘구분’을 만들어낸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32억개 염기 중 유전자로 작용하는 것은 대략 2%에 불과하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나머지 98%는 별다른 기능을 하지 않는 ‘정크(쓰레기) DNA’로 불렸다. 인간 진화 과정에서 퇴화해 기능은 없어지고 DNA 2중 나선 구조에 자리만 잡고 있다는 추정이었다.
하지만 ‘정크 DNA’의 80% 정도가 암 심장병 정신질환 등 각종 질병과 돌연변이에 관여한다는 사실이 국제공동연구로 밝혀졌다. 미국 영국 일본 싱가포르 등 32개 연구소의 과학자 442명이 참여한 ‘DNA백과사전’ 프로젝트를 통해서다. 2003년 인간 게놈 지도가 처음 그려진 지 10년 만에 세밀지도가 완성됐다는 뜻이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는 주장도 있다. 예컨대 백과사전의 글자 나열방식만 알았을 뿐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 낱낱이 해독해내지는 못했다는 거다. 어떤 학자는 “10만개의 부품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해서 보잉기가 저절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개인 유전정보 공개로 인한 윤리적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렇다 해도 게놈의 세밀지도를 활용하면 각종 난치병과 유전 질환의 발병 원인을 밝혀내고, 맞춤 신약 시대도 앞당길 수 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진화생물학 연구에도 기여할 게 틀림없다. 더디지만 인간 생명의 비밀은 조금씩 벗겨지고 있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