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배심원제의 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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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현 논설위원 forest@hankyung.com
‘12인의 성난 사람들’이란 영화는 1957년 시드니 루멧 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아버지를 죽인 혐의를 받고 있는 18세 소년의 무죄를 추정해 나가는 12명의 배심원 이야기다. 페인트공 축구코치 등이 밀폐된 방에서 거친 말로 벌이는 논리대결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미국 배심원 제도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배심원 제도는 규약법(Codified law)이 아닌 관습법(Common law)을 채용한 영미계통에서 준용하는 재판제도다. 법관의 독단을 막고, 국민들이 사법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성문화된 법 조문이 아닌 판례와 일반인의 상식적인 법 정서를 판결의 근거로 삼는다. ‘위대한 반대자’로 불렸던 미국 대법관 올리버 홉스는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재판정에서 개최된 촌락회의
미국에선 배심원으로 복무하는 것을 투표 및 납세와 함께 국민의 3대 의무로 꼽는다. 누구나 배심원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은 배심원의 능력과 자질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미국의 유명한 법학자인 J. H. 지어스는 “배심원은 인종 언어 종교적 동질성이 있어야 하고 개인적 편견을 버릴 수 있는 교양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흑인 미식 축구선수 O.J.심슨의 살인죄에 대한 재판은 배심원들이 집단적 동류의식에 사로잡혔을 때 진실을 어떻게 호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심슨의 변호사들이 살인사건을 인종차별 논쟁으로 몰고간 형사재판에서 그에겐 무죄가 선고됐다. 이때 배심원 12명 중 9명이 흑인이었다. 3년 뒤 열린 민사재판에선 반대로 유죄가 인정됐다. 배심원단엔 흑인이 한 명도 없었다. 심슨은 나중에 살인을 시인했다.
배심원의 선정과 재판진행상의 오류는 삼성-애플, 코오롱-듀폰의 판결에서도 반복됐다. 애플과 듀폰의 공장이 있는 곳에서, 직간접적 이해가 걸린 동네사람들이 배심원의 타이틀을 달고 모여 판결했다. “기술이 복잡해 선행기술은 검토하지 않았다”는 배심원의 판단능력 부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플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큰 특허를 보유한 벨빈 호건이 삼성-애플 재판의 배심원 대표로 활동하고, 변호사로 21년간 듀폰의 특허소송을 대리했던 사람이 코오롱-듀폰 사건의 재판장이었다.
애플 듀폰 제2의 와트 가능성
이번 판결에서는 배심원 선발 등에 관한 미국 법의 허술함과 함께 미국의 왜곡된 애국주의도 드러났다. 과거 일본과 한국이 반도체를 만들며 첨단기술분야에서 추격하자 무역보복으로 즉각 응징했던 미국이다. 물론 미국에서 백열전구, 컴퓨터, 전화기, 비행기 등 세상을 바꾼 수많은 창조물이 탄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경쟁우위를 가져야 선(善)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악(惡)이란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삼성-애플소송의 배심원 대표인 벨빈 호건이 “삼성에 큰 고통을 주고 싶었다”고 한 말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왜곡된 우월주의가 상식을 깔아뭉갠 이 판결들이 훗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 수 없다. 애플과 듀폰은 증기기관을 발명한 뒤 시장에서 퇴출된 제임스 와트꼴이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와트는 증기기관의 특허권을 연장해가며 기술적 우위를 즐겼으나 특허기간이 끝나자 곧바로 3류기술자로 전락했다. 법의 보호에 안주하며 기술개발을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혁신이 아닌 법의 보호를 탐닉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이비 우월주의가 판치는 한 애플과 듀폰은 결코 기술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릴 수 없다.
조주현 논설위원 forest@hankyung.com
배심원 제도는 규약법(Codified law)이 아닌 관습법(Common law)을 채용한 영미계통에서 준용하는 재판제도다. 법관의 독단을 막고, 국민들이 사법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성문화된 법 조문이 아닌 판례와 일반인의 상식적인 법 정서를 판결의 근거로 삼는다. ‘위대한 반대자’로 불렸던 미국 대법관 올리버 홉스는 “법의 생명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재판정에서 개최된 촌락회의
미국에선 배심원으로 복무하는 것을 투표 및 납세와 함께 국민의 3대 의무로 꼽는다. 누구나 배심원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은 배심원의 능력과 자질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미국의 유명한 법학자인 J. H. 지어스는 “배심원은 인종 언어 종교적 동질성이 있어야 하고 개인적 편견을 버릴 수 있는 교양을 갖춰야 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흑인 미식 축구선수 O.J.심슨의 살인죄에 대한 재판은 배심원들이 집단적 동류의식에 사로잡혔을 때 진실을 어떻게 호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심슨의 변호사들이 살인사건을 인종차별 논쟁으로 몰고간 형사재판에서 그에겐 무죄가 선고됐다. 이때 배심원 12명 중 9명이 흑인이었다. 3년 뒤 열린 민사재판에선 반대로 유죄가 인정됐다. 배심원단엔 흑인이 한 명도 없었다. 심슨은 나중에 살인을 시인했다.
배심원의 선정과 재판진행상의 오류는 삼성-애플, 코오롱-듀폰의 판결에서도 반복됐다. 애플과 듀폰의 공장이 있는 곳에서, 직간접적 이해가 걸린 동네사람들이 배심원의 타이틀을 달고 모여 판결했다. “기술이 복잡해 선행기술은 검토하지 않았다”는 배심원의 판단능력 부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플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큰 특허를 보유한 벨빈 호건이 삼성-애플 재판의 배심원 대표로 활동하고, 변호사로 21년간 듀폰의 특허소송을 대리했던 사람이 코오롱-듀폰 사건의 재판장이었다.
애플 듀폰 제2의 와트 가능성
이번 판결에서는 배심원 선발 등에 관한 미국 법의 허술함과 함께 미국의 왜곡된 애국주의도 드러났다. 과거 일본과 한국이 반도체를 만들며 첨단기술분야에서 추격하자 무역보복으로 즉각 응징했던 미국이다. 물론 미국에서 백열전구, 컴퓨터, 전화기, 비행기 등 세상을 바꾼 수많은 창조물이 탄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미국이 경쟁우위를 가져야 선(善)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은 악(惡)이란 논리는 성립되지 않는다. 삼성-애플소송의 배심원 대표인 벨빈 호건이 “삼성에 큰 고통을 주고 싶었다”고 한 말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왜곡된 우월주의가 상식을 깔아뭉갠 이 판결들이 훗날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 수 없다. 애플과 듀폰은 증기기관을 발명한 뒤 시장에서 퇴출된 제임스 와트꼴이 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와트는 증기기관의 특허권을 연장해가며 기술적 우위를 즐겼으나 특허기간이 끝나자 곧바로 3류기술자로 전락했다. 법의 보호에 안주하며 기술개발을 등한히 했기 때문이다. 혁신이 아닌 법의 보호를 탐닉하고, 그것을 지지하는 사이비 우월주의가 판치는 한 애플과 듀폰은 결코 기술진보의 아이콘으로 불릴 수 없다.
조주현 논설위원 fore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