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갈수록 좁아진다는 느낌이 든다. 사람들은 조금만 옆으로 움직여도 남과 부딪칠까봐 조심하는 표정들이다. 헐렁한 옷을 걸치고 그 옷만큼이나 엉성한 모습으로 넓은 세상을 한 눈에 쓸어 담았던 옛 선비들의 큰 인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김시습, 남효온 등 조선전기의 방외인(方外人)들은 노장풍(老莊風)의 멋을 풍기며 저잣거리의 술집을 누비고 다녔다. 소총(篠叢) 홍유손(1431~1529)은 김시습에 대한 제문에서 유·불·승·속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의 일생을 회상하면서 술친구를 마지막 보내는 절통한 심정을 표현했다. 《소총유고(篠叢遺稿)》중 ‘김열경 시습에 대한 제문(祭金悅卿時習文)’이다.

‘아! 우리 공께서는 세상에 태어난 지 겨우 다섯 살에 이름이 크게 알려졌으니, 삼각산(三角山) 운운한 절구 한 수를 짓자 노사(老師) 숙유(宿儒)들이 탄복했고 온 세상이 놀라 떠들썩했으며, 이에 사람들은 “중니(仲尼)가 다시 태어났다”고들 했습니다. 그러나 공은 벼슬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머리를 깎고 불문에 몸을 의탁해, 공맹의 밝은 도에 통하는 한편 천축의 현묘한 학설을 공부했습니다.’

제문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에 모르는 사람들은 미쳤다고들 했지만, 그 내면에 온축된 참된 세계에 탄복했으니, 많은 벼슬아치들이 공과 어깨를 나란히 벗해 격식을 따지지 않고 흉허물 없이 지냈으나 공은 오연히 세상 사람들을 굽어보았습니다.저 명산대천들이 공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어, 기암괴석과 빼어난 하천(河川)들이 공의 품평에 의해 그 이름이 더욱 알려지곤 했습니다.’

절친했던 남효온을 비롯한 친구들의 슬픔도 전한다.

‘만년에는 추강(秋江·남효온)과 서로 뜻이 맞아 지극한 이치를 유감없이 담론했으며, 그리하여 함께 월호(月湖)에서 소요했는데 헤어지고 만남이 언제나 약속한 듯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추강이 공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공은 그만 둘도 없는 지기(知己)를 잃고 말았습니다. 슬프다! 오늘 공이 시해(尸解·죽음)하심은 어찌 황천으로 추강을 만나러 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해 벼슬하지 않고 불문에 몸을 의탁했던 김시습과 같이 추강 남효온도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27세 때 어머니의 당부로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해 합격하기도 했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홍유손, 이총 등과 함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면서 방외인의 삶을 살았다. 19세 연상인 김시습과는 망년(忘年)의 벗으로 절친했다.

조선은 주자학의 나라임을 표방했지만 전기에는 대개 극성하던 불교의 영향력이 남아 있어 선비들이 불교, 노장, 유교의 경계선을 엄밀히 긋지 않았다. 김시습과 남효온은 모두 생육신에 속한 선비들로 절의를 목숨보다 소중히 지켜 스스로 유자(儒者)임을 자처했지만, 정작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노장과 불교 풍의 방달불기(放達不羈), 자유분방 그 자체다. 대개 상식이 통하지 않는, 포악한 세상에서 힘없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저항은 술과 객기, 이해할 수 없는 기행으로 표출되곤 하니, 김시습과 남효온의 삶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저항의 모습이었다. 또한 답답한 현실을 견디지 못한 천재의 일탈(逸脫)이었다.

평소 저자에서 김시습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술꾼들이 김시습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있다는 대목에서, 오늘날 술꾼들이 정든 술친구를 마지막 보내는 슬픔을 어렵지 않게 연상할 수 있다. 세상을 조롱하듯 술 취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허름한 대폿집에 앉아 있는 김시습, 남효온의 모습이 떠오른다.사람들이 세상 북새통에 끼지 못할세라 아등바등 다투고 있는 오늘날, 저만큼 세상을 비켜서서 득실과 영욕을 덧없는 몽환(夢幻)처럼 보았던 이들이 새삼 그리워진다.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교수 >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itkc.or.kr)의 ‘고전포럼-고전의 향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