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은 커녕 4시에 퇴근 '꿈의 직장' 한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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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 노동제'로 파격적 실험 보리출판사
일터와 삶터가 나뉘지 않는 '행복한 삶'
시곗바늘이 4시를 가리키자 직원들이 하나둘 짐을 챙겨 퇴근 준비를 한다.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일에 집중하고 있는 직원에게 동료 직원이 묻는다. “오늘 야근해?” 지난 3월부터 ‘6시간 노동제’를 시행 중인 보리출판사에서는 오후 4시가 ‘칼퇴근’ 시간이다. 집이 직장에서 가까운 사람들은 4시 10분이면 집에 도착해 집안일을 하기도 하고 아이를 돌보기도 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밤늦게 퇴근해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는커녕 얼굴 보기도 힘든 여느 직장인들의 하루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일상이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6시간, 주간으로 치면 30시간 근무다. 지난해 12월 지식경제부 발표에 따르면 2010년 우리니라 연평균 노동시간은 2193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국 가운데 가장 길고 OECD 국가 평균인 1749시간보다 무려 444시간이나 많다. 이처럼 장시간 노동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인 상황에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간혹 6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기업 사례도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더구나 근무시간이 줄었음에도 임금 감소는 전혀 없고 오히려 연장 근로가 발생하면 시간을 적립해 대체 휴가로 쓸 수 있으니 말 그대로 ‘꿈의 직장’이다.
임금 감소 없고 연장 근로 적립해 휴가
보리출판사의 사례가 알려진 후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긍정적인 시선과 함께 이 제도를 잘 정착시켜 좋은 본보기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는 제시간에 퇴근만 해도 좋겠다’며 상대적 박탈감과 자괴감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리출판사의 경영자이자 6시간 노동제 탄생에 절대적 역할을 한 농부 철학자 윤구병 대표가 직원들에게 자긍심보다 겸손함을 주문한 데도 그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는 단순히 직원들을 위한 ‘복지’나 ‘혜택’ 차원이 아닌 사회에 던지는 하나의 강한 메시지다. 여기에는 윤 대표의 남다른 공동체 철학이 깔려 있다. 노동시간은 빈곤, 임금, 가족 관계와 공동체, 건강과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다함께 더불어 사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사실 6시간 노동제는 보리출판사가 그동안 책을 통해 말해 왔던 가치들의 연장선이다. 1988년 어린이 그림책 전문 기획 집단인 ‘보리 기획’으로 출발한 보리출판사는 1991년 (주)도서출판 보리로 출판 등록을 한 뒤 지금까지 아기들을 위한 그림책에서부터 어린이와 청소년, 어른에 이르기까지 세상 보는 눈을 길러주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싹 틔우는 책들을 펴내고 있다. ‘나무 한그루를 베어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자’나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등은 보리출판사의 가치관을 잘 대변해 준다.
‘3000권 팔리고 말 책 10권을 만들기보다 공들여서 3만권 팔릴 책 한 권을 만들자’는 보리출판사의 모토처럼 6시간 노동제가 탄생하는 데도 33명 전 직원들의 깊이 있는 고민이 전제가 됐다. 지난해 5월 윤 대표가 직원들에게 한 권씩 나눠준 책이 계기였다. 평소에도 좋은 책이나 문화를 누군가 전파하고 함께 나누는 분위기였지만 당시 윤 대표가 나눠준 책 ‘8시간 vs 6시간-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는 단순한 전파에서 끝나지 않고 독서 토론으로 이어져 실질적인 제도 도입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대됐다.
일의 강도 자체를 낮춰 효과 높일 것
오랜 고민과 논의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6시간 노동제의 도입 자체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6시간 노동제 TFT’를 이끈 기획2부 조혜원 부장은 “업무 시간을 2시간 줄이면서 업무 양식이 달라지다 보니 직원들 스스로 적응이 될지, 정말 4시 퇴근이 가능할지부터, 그래서 과연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지에 대한 부분까지 걱정이 많았다”면서 “막상 시작해 보니 대체로 잘들 지키고 있어 이제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근무시간 단축으로 아무리 업무 집중도가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하루 2시간의 공백은 클 수밖에 없다. 6시간 노동제와 함께 ‘시간 적립제’를 도입해 발생한 연장 근로시간만큼 적립해 수당이 아닌 대체 휴가로 쓰도록 했지만 그에 따른 무한 연장 근로의 병폐를 막기 위해 ‘한 달 연장 근로 18시간 이내’ 조항을 달면서 업무량 조절에 대한 필요성도 제기됐다.
그래서 보리출판사는 연간 발행하는 책 권수를 줄이는 등 일의 강도 자체를 낮춰 근무시간 단축 효과를 높이기로 했다. 처음부터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한 제도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기업으로서는 매출 등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정이 가능했던 것은 보리출판사의 콘텐츠 자체가 스테디셀러가 많아 한두 권 덜 발행한다고 하더라도 매출에 커다란 지장을 줄 수준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조 부장은 “절판된 책이 없고 구간 매출이 다른 회사보다 높아 일을 줄여도 타격이 적을 수 있는 생산량이었다”며 “아직은 시작 단계라 6시간 노동제에 따른 매출 효과 등을 측정하기 힘들고 연말이 되면 확실한 비교가 될 것 같은데, 우리도 그 결과가 굉장히 궁금하다”고 했다.
원래도 가족 같은 분위기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정도가 여느 직장인들과 달랐던 이 회사 직원들은 6시간 노동제 시행 후 한결 더 행복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특히 기혼 여성들의 만족도는 남달랐다. 초등학생 두 아이를 둔 한선희 씨는 “이제는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보다 먼저 집에 가 있을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했다.
“6시간 노동제의 진정한 수혜자들은 우리 회사 남자 직원들의 아내”라고 말하는 윤 대표의 농담처럼 기혼 남성 직원들은 그동안 거의 하지 않았던 집안일과 육아에도 참여하고 있다. 20대 미혼인 김누리 씨는 “한 달 간은 그냥 누워 있었는데 지금은 외국어 공부도 하고 있다”며 “빨리 퇴근한다는 생각에 출근 스트레스가 없어졌고 그만큼 회사에서의 시간을 계획적으로 쓰고 있다”고 밝혔다.
조 부장은 “우리부터 인간다운 삶을 살고 단축된 근로시간으로 생긴 여유를 이웃이나 공동체와 함께 나눔으로써 사회가 변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6시간 노동제의 진정한 안착”이라며 “이 제도 자체에 우려를 표하는 경영자들이 많지만 막상 한 달만 해봐도 얻어지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
일터와 삶터가 나뉘지 않는 '행복한 삶'
시곗바늘이 4시를 가리키자 직원들이 하나둘 짐을 챙겨 퇴근 준비를 한다.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여전히 일에 집중하고 있는 직원에게 동료 직원이 묻는다. “오늘 야근해?” 지난 3월부터 ‘6시간 노동제’를 시행 중인 보리출판사에서는 오후 4시가 ‘칼퇴근’ 시간이다. 집이 직장에서 가까운 사람들은 4시 10분이면 집에 도착해 집안일을 하기도 하고 아이를 돌보기도 하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밤늦게 퇴근해 가족들과 함께하는 저녁식사는커녕 얼굴 보기도 힘든 여느 직장인들의 하루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일상이다.
오전 9시에 출근해 점심시간 1시간을 제외하면 하루 6시간, 주간으로 치면 30시간 근무다. 지난해 12월 지식경제부 발표에 따르면 2010년 우리니라 연평균 노동시간은 2193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국 가운데 가장 길고 OECD 국가 평균인 1749시간보다 무려 444시간이나 많다. 이처럼 장시간 노동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인 상황에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는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등 선진국에서는 간혹 6시간 근무제를 도입한 기업 사례도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더구나 근무시간이 줄었음에도 임금 감소는 전혀 없고 오히려 연장 근로가 발생하면 시간을 적립해 대체 휴가로 쓸 수 있으니 말 그대로 ‘꿈의 직장’이다.
임금 감소 없고 연장 근로 적립해 휴가
보리출판사의 사례가 알려진 후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긍정적인 시선과 함께 이 제도를 잘 정착시켜 좋은 본보기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는 제시간에 퇴근만 해도 좋겠다’며 상대적 박탈감과 자괴감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리출판사의 경영자이자 6시간 노동제 탄생에 절대적 역할을 한 농부 철학자 윤구병 대표가 직원들에게 자긍심보다 겸손함을 주문한 데도 그런 배경이 깔려 있었다.
보리출판사의 6시간 노동제는 단순히 직원들을 위한 ‘복지’나 ‘혜택’ 차원이 아닌 사회에 던지는 하나의 강한 메시지다. 여기에는 윤 대표의 남다른 공동체 철학이 깔려 있다. 노동시간은 빈곤, 임금, 가족 관계와 공동체, 건강과 삶의 질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노동시간 단축을 통해 다함께 더불어 사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사실 6시간 노동제는 보리출판사가 그동안 책을 통해 말해 왔던 가치들의 연장선이다. 1988년 어린이 그림책 전문 기획 집단인 ‘보리 기획’으로 출발한 보리출판사는 1991년 (주)도서출판 보리로 출판 등록을 한 뒤 지금까지 아기들을 위한 그림책에서부터 어린이와 청소년, 어른에 이르기까지 세상 보는 눈을 길러주고 새로운 삶의 가치를 싹 틔우는 책들을 펴내고 있다. ‘나무 한그루를 베어낼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을 만들자’나 ‘다른 출판사와 경쟁하지 말고 출판의 빈 고리를 메우자’ 등은 보리출판사의 가치관을 잘 대변해 준다.
‘3000권 팔리고 말 책 10권을 만들기보다 공들여서 3만권 팔릴 책 한 권을 만들자’는 보리출판사의 모토처럼 6시간 노동제가 탄생하는 데도 33명 전 직원들의 깊이 있는 고민이 전제가 됐다. 지난해 5월 윤 대표가 직원들에게 한 권씩 나눠준 책이 계기였다. 평소에도 좋은 책이나 문화를 누군가 전파하고 함께 나누는 분위기였지만 당시 윤 대표가 나눠준 책 ‘8시간 vs 6시간-켈로그의 6시간 노동제 1930-1985’는 단순한 전파에서 끝나지 않고 독서 토론으로 이어져 실질적인 제도 도입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대됐다.
일의 강도 자체를 낮춰 효과 높일 것
오랜 고민과 논의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6시간 노동제의 도입 자체에 대한 걱정과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6시간 노동제 TFT’를 이끈 기획2부 조혜원 부장은 “업무 시간을 2시간 줄이면서 업무 양식이 달라지다 보니 직원들 스스로 적응이 될지, 정말 4시 퇴근이 가능할지부터, 그래서 과연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지에 대한 부분까지 걱정이 많았다”면서 “막상 시작해 보니 대체로 잘들 지키고 있어 이제는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말했다.
근무시간 단축으로 아무리 업무 집중도가 높아진다고 하더라도 하루 2시간의 공백은 클 수밖에 없다. 6시간 노동제와 함께 ‘시간 적립제’를 도입해 발생한 연장 근로시간만큼 적립해 수당이 아닌 대체 휴가로 쓰도록 했지만 그에 따른 무한 연장 근로의 병폐를 막기 위해 ‘한 달 연장 근로 18시간 이내’ 조항을 달면서 업무량 조절에 대한 필요성도 제기됐다.
그래서 보리출판사는 연간 발행하는 책 권수를 줄이는 등 일의 강도 자체를 낮춰 근무시간 단축 효과를 높이기로 했다. 처음부터 생산성 향상을 목표로 한 제도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기업으로서는 매출 등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정이 가능했던 것은 보리출판사의 콘텐츠 자체가 스테디셀러가 많아 한두 권 덜 발행한다고 하더라도 매출에 커다란 지장을 줄 수준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조 부장은 “절판된 책이 없고 구간 매출이 다른 회사보다 높아 일을 줄여도 타격이 적을 수 있는 생산량이었다”며 “아직은 시작 단계라 6시간 노동제에 따른 매출 효과 등을 측정하기 힘들고 연말이 되면 확실한 비교가 될 것 같은데, 우리도 그 결과가 굉장히 궁금하다”고 했다.
원래도 가족 같은 분위기로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 정도가 여느 직장인들과 달랐던 이 회사 직원들은 6시간 노동제 시행 후 한결 더 행복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특히 기혼 여성들의 만족도는 남달랐다. 초등학생 두 아이를 둔 한선희 씨는 “이제는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올 시간보다 먼저 집에 가 있을 수 있어 너무 좋다”고 했다.
“6시간 노동제의 진정한 수혜자들은 우리 회사 남자 직원들의 아내”라고 말하는 윤 대표의 농담처럼 기혼 남성 직원들은 그동안 거의 하지 않았던 집안일과 육아에도 참여하고 있다. 20대 미혼인 김누리 씨는 “한 달 간은 그냥 누워 있었는데 지금은 외국어 공부도 하고 있다”며 “빨리 퇴근한다는 생각에 출근 스트레스가 없어졌고 그만큼 회사에서의 시간을 계획적으로 쓰고 있다”고 밝혔다.
조 부장은 “우리부터 인간다운 삶을 살고 단축된 근로시간으로 생긴 여유를 이웃이나 공동체와 함께 나눔으로써 사회가 변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게 6시간 노동제의 진정한 안착”이라며 “이 제도 자체에 우려를 표하는 경영자들이 많지만 막상 한 달만 해봐도 얻어지는 게 훨씬 더 많다는 걸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진영 기자 bluepj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