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소설가 카투리안(김준원)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경찰서 조사실에 앉아 있다. 옆방에는 카투리안이 끔찍이도 아끼는 형 마이클(이현철)이 잡혀와 있다. 형제는 3주 전에 벌어진 아동 살해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된 상태다. 카투리안은 어둡고 잔인한 내용의 소설을 써왔는데 공교롭게도 그 소설 속 사건과 똑같은 수법으로 아이들이 살해됐다. 형사반장 투폴스키(손종학)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형사 에리얼(조운)의 심문은 집요하게 이어지고, 형제가 어린 시절 겪었던 끔찍한 사건의 전말이 드러난다.

연극 ‘필로우맨’(연출 변정주·사진)을 지탱하는 축은 ‘단단한 이야기’다. 배우들의 땀방울까지 보이는 소극장 무대의 소품은 탁자와 캐비닛이 전부이고, 등장인물도 단 4명뿐이다. 그럼에도 두 시간 반이 넘는 공연 시간 내내 동력을 잃지 않는 건 이야기가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상상을 뛰어넘는 이야기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극은 출구 쪽에 다다라 있다.

극의 재미를 더해주는 또 다른 축은 ‘경계 허물기’다. 어디까지가 소설이고, 어디까지가 카투리안 형제가 겪은 이야기인지 불분명한 이야기 전달 방식은 관객으로 하여금 현실과 연극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잔혹한 영화를 볼 때처럼 공포감을 느끼다가 등장인물들의 위트 있는 말장난에 잠시 긴장을 놓는 사이 슬픔이 치고 들어오는 등 다양한 감정이 섞이는 순간의 묘한 기분을 맛보게 된다.

‘필로우맨’은 카투리안의 소설 중 마이클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의 제목이다. 베개로 만들어진 필로우맨은 끔찍한 미래를 살게 될 어린이들을 찾아가 자살을 돕는 인물. 소설 속 주인공인 동시에 마이클의 제2의 자아이자, 형을 대신해 부모를 죽인 카투리안의 모습이기도 하다.

영국 작가 마틴 맥도너의 작품으로 국내엔 2007년 초연 이후 5년 만의 재공연이다. 배우들의 열연은 물론 연출가 변정주가 번역한 대사도 극에 힘을 더한다. 내달 1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전석 4만원. (02)744-4334

김인선 기자 indd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