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창근 칼럼] 일본 따라잡았다. 앞이 안 보인다
일본 전자산업 추락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100년 역사의 샤프가 창업 이래 처음으로 대규모 정리해고에 들어가기로 했다. 전체 종업원의 9%에 이르는 5000여명이 감축대상이다. 샤프야말로 종신고용의 상징이었다는 점에서 일본 재계에도 그 충격파가 크다.

고용유지는 샤프 창업자 하야카와 도쿠지(早川德次)의 유훈이다. 태평양전쟁 패전 후 불황이 극심했던 1950년 은행들이 “회사 문을 닫지 않으려면 감원하라”고 요구했을 때, 그는 “종업원을 자르느니 회사 문을 닫겠다”고 버텼다. 당시 회사부터 살려야 한다며 200여명이 스스로 떠난 이후 샤프는 어떤 위기에도 강제로 직원을 내보내지 않았다. 그 금기까지 깨진 것이다.

샤프뿐이 아니다. 일본을 전자왕국으로 이끌었던 양대 산맥 소니와 파나소닉도 깊은 늪에 빠져 헤어날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지 오래다. 소니는 지난해에만 5200억엔에 달하는 적자를 냈다. 4년 연속 적자다. 파나소닉의 지난해 적자는 7800억엔으로 일본 기업 사상 최대 규모다. 일본이 1980년대 세계시장의 80%까지 장악했던 D램 반도체의 위세를 되찾기 위한 마지막 희망 엘피다(그리스어로 희망을 뜻하는 이름)도 결국 무너져 미국 마이크론에 넘어갔다. 일본 전자산업은 이제 재기불능이라는 탄식까지 나온다.

그 반대 쪽에 한국의 성공이 자리한다. 특히 삼성전자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으로 여겼던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등을 잇따라 제치면서 TV와 반도체 세계 1위에 올라섰고, 애플 쇼크로 지각이 뒤집혀진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도 최고의 자리를 차지해 일본의 추격의지를 완전히 꺾었다. 일본 전자산업 침몰의 이유로 1등의 자만에 취해 자기혁신에 실패하고 폐쇄성의 함정에 빠져버리는 등 여러 문제가 지적된다. 본질적으로는 미국을 따라잡고 난 뒤 일본경제가 방향성을 상실했다는 진단, 그런 점에서 노벨 경제학상 후보에도 올랐던 석학 모리시마 미치오(森嶋通夫)의 10여년 전 통찰이 정곡(正鵠)을 찌른다.

국내에서도 화제를 모은 1998년 저서《왜 일본은 몰락하는가》에서 그는 사회구조적 혁신 리더십 부재가 결국 일본 경제를 파탄에 빠뜨릴 것이라고 경고했었다. “일본의 정치인·관료·기업인들은 과거 군국주의 시절 몸에 밴,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허약하고 자신없는 리더십의 결함을 안고 있다. 따라하고 배우면서 극복할 미국이라는 목표가 일본 경제를 성공시킨 요인이었지만 추종할 대상이 없어지면 그 위기를 탈출할 힘이 없는 것이 한계”라는 주장이었다.

확실히 일본은 미국을 극복하고, TV출현 이후 1940~1960년대 세계 전자산업의 맹주였던 RCA를 소니가 이겨내면서 1970년대부터 세계시장을 30년 지배했다. 지금 세계 최강의 삼성이 당시에는 2류의 산요로부터 겨우 기술을 얻어와야 하는 처지였다. 한국 타도를 기치로 히타치와 합작해 1999년 엘피다를 세웠던 NEC만 해도, 삼성이 1983년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이래 끊임없이 벤치마킹의 모델로 삼은 최고의 기업이었다.

모든 반전은 불과 10여년 사이에 이뤄진 일이다. 삼성이 정상에 올라 세계 전자산업의 주도권을 잡은 원동력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많다. 가장 중요한 성취동기이자 성공 에너지는 ‘일본을 반드시 따라잡고 이기겠다’는 한국인 특유의 극일(克日) DNA(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은 경로 그대로, 우리 또한 같은 발전전략으로 일본을 베끼고 배우면서 연구해 결국 일본을 따돌리는 목표를 이뤄냈다. 바꿔말하면 이제 앞서가던 상대를 제친 후 빠르게 따라갈 목표는 사라지고 맹렬히 뒤쫓아오는 추격자들만 존재한다는 뜻이다. 앞 길이 캄캄한, 이제와는 전혀 다른 경쟁환경이다.

다들 우리 산업과 기술 모방구조의 창조적 파괴, 혁신적 돌파를 얘기한다. 말은 쉽지만 과거에 맞닥뜨린 적 없고 여태 가보지 않았던 길이다. 삼성전자가 세계시장의 게임체인저(game changer)가 되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치고 나가야 할지, 먼저 움직이는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전략이 과연 맞는지, 스스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역량은 있는지, 그래서 우리 경제가 일본이 실패한 길을 피해갈 수 있을지…. 방향등 없는 안개속을 어떻게 헤쳐나가나.

추창근 기획심의실장·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