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카드회사 홈페이지에 접속해 체크카드를 신청하려던 김모씨는 황당한 일을 겪었다. 체크카드 결제계좌로 자신의 주거래은행 계좌를 연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신용카드 대금은 어느 은행 계좌로든 결제할 수 있는데, 왜 체크카드는 특정 은행의 계좌만 지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소비자 편익을 무시한 처사”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사실 카드사들의 약속대로라면 김씨가 겪는 불편함은 벌써 없어져야 했다. 지난 2월 금융위원회의 권고를 받아들여 국민, 우리, 신한, 하나, 농협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은 모든 카드사들에 체크카드 결제계좌를 열어주기로 합의했다. 체크카드를 활성화하겠다는 당국의 정책에 동참한다는 취지에서였다. 결제계좌 개방과 더불어 체크카드 사용금액의 0.5%인 계좌 이용 수수료율을 0.2%로 내리고, 자사의 현금인출기에서 자유롭게 예금을 찾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도 했다.

하지만 은행들은 어떤 약속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이를 위한 전산작업은 기껏해야 한 달이면 족한데, 한없이 미적대고 있다. 심지어 한 은행은 당시 합의에 동의했던 부행장이 해당 업무를 담당하는 인사가 아니었다며 발을 빼려는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은행들이 신용카드사들에 체크카드 결제계좌를 열어주지 않으려는 이유는 뻔하다. 독점 계약을 활용해 돈벌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특정 카드사와 독점 계약을 하면 대가를 요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카드사 직원들의 월급통장을 유치할 수도 있고 카드사의 유휴 자금을 예치받을 수 있다. 은행들은 이런 이익을 포기하기 싫은 탓에 소비자들의 편익은 나몰라라 하는 것이다.

소비자 편익에 무관심한 은행은 고객들로부터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작은 불신이 쌓이면 은행들은 탐욕에 젖은 집단으로 비판받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아무리 자정결의대회를 해도 이 같은 불신을 털어낼 수는 없다. 게다가 체크카드의 결제계좌 개방은 은행들 스스로 약속까지 한 것이다.

금융위도 말로만 금융소비자 보호를 외칠 게 아니다. 금융사들이 한 약속이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여부를 꼼꼼히 챙겨봐야 한다. 뚜렷한 이유 없이 약속이나 규칙을 어기고 있는데 뒷짐만 진 채 방관하고 있다면 금융감독 당국도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박종서 금융부 기자 cosm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