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앙은행(ECB)이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재정위기국 국채를 추가로 사들일 수 있다고 시사하자 과연 언제쯤, 어느 정도 규모로 매입에 나설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CB의 추가 국채 매입 가능성이 나오자마자 재정위기국 국채 금리가 떨어지고, 증시는 반등하는 등 시장은 일제히 환영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ECB가 태도 변화 조짐을 보였지만 아직 낙관하기는 이르다”는 신중론도 나오고 있다.

프랑스 일간 르몽드는 27일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ECB와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이 유통시장에서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를 매입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와 관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이날 전화로 스페인 등에 대한 지원 방안을 논의했다.

전날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런던에서 열린 투자 콘퍼런스에서 “유로존 구제를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나를 믿어달라. 구제 조치는 충분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도 이메일 성명을 내고 “유로존을 지키기 위해 모든 수단을 강구하겠다는 드라기 총재의 발언을 적극 지지한다”고 말했다.

시장은 드라기 총재의 발언을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 매입 재개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해석했다. ECB는 2010년 5월부터 올해 2월까지 2100억유로 규모의 유로존 국채를 사들인 뒤 매입을 일시 중단했다.

드라기 총재의 발언으로 금융시장은 안정됐다. 스페인 10년물 국채금리는 전날 연 6.93%로 거래를 마감하며 1주일 만에 7% 아래로 떨어진 데 이어 27일에는 장 초반 연 6.75%까지 추가 하락했다. 이탈리아 10년물 국채금리도 이날 장중 연 5.85%로 6% 아래로 내려갔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드라기 총재가 국채 매입 재개를 거론하진 않았지만 직접 말한 것과 같은 효과를 봤다”고 평가했다. 드라기 총재에 앞서 지난 25일엔 에발트 노보트니 ECB 집행이사가 “재정위기 대응기구인 유로안정화기구(ESM)에 은행 면허를 부여해 ECB 자금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ECB의 태도 변화에 물꼬를 텄다.

하지만 데이비드 로이드 M&G인베스트먼트 이사는 “ECB가 최근 (국채 매입 쪽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점은 감지되지만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라고 말했다. ECB가 대규모로 유로존 국채를 다시 사들이기엔 법적·정치적 제약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ECB 자금을 유로존 재정정책에 지나치게 투입하면 ECB의 독립성이 침해될 수 있고, 국채 매입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질 수 있는 탓에 제약이 많다.

카르스텐 브르제스키 ING 애널리스트는 “드라기 총재가 강도 높은 발언으로 일단 시장에 희망을 심어줬지만 향후 행보가 실망스럽다면 시장은 더욱 요동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