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진화론으로 본 시장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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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의 한 부분이 거슬린다면
원인을 찾아내 환경을 바꿔야
정치적으로 시장 흔들면 안돼
복거일 < 소설가 >
원인을 찾아내 환경을 바꿔야
정치적으로 시장 흔들면 안돼
복거일 < 소설가 >
‘경제 민주화’가 문득 정치 일정의 앞자리를 차지했다. 대통령 후보들이 너나없이 내세우고 있어 누가 집권하더라도 그것은 경제 정책의 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 민주화는 경제 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의 실현을 뜻한다. 경제 민주주의는 19세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의 평등화’라는 뜻으로 썼다. 바로 공산주의 경제 체제를 가리킨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힘을 잃게 되자 경제 민주주의도 체계적 이론으로 존재하기를 멈췄다.
근년에 경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사소한 정책들을 포장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선 주로 재벌을 억제하거나 해체하자는 주장을 뜻한다.
그런 주장들의 이론적 바탕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노동량 가치설(quantity-theory of value)’이다. 이 이론은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원시적 이론으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도 오래 전에 버렸다.
이처럼 경제 민주화는 시장에 적대적이다. 시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장의 움직임에서 나온 결과를 부정한다. 자연히 지금 우리의 시장경제는 근본적인 위협을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려면 시장의 본질에 대해 잘 살펴야 한다.
태초에 시장이 있었다. 국가도 법도 없었을 때도 사람들은 교환을 해서 자신들의 복지를 늘렸다. 국가가 나타나자 시장은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진화해 왔다. 국방과 치안을 통해 재산권이 확립되면서 시장은 발전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잘못되면 시장은 왜곡되고 자라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국가나 종교는 시장에 적대적이었고 그래서 경제 발전을 어렵게 했다.
진화는 이 세상의 존재를 잘 설명한다. 진화를 통해 생태계와 문화가 나왔고 발전했다. 경제주체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시장은 진화에 가장 좋은 기구다. 진화는 많은 변이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그런 변이들 가운데 환경에 잘 적응된 것들이 살아남아서 전파된다는 공식을 따른다. 기업들은 늘 보다 나은 제품들과 서비스들을 만들어내고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수요에 맞는 것들을 고르며 그렇게 선택된 제품들과 기업들은 자라나고 버림받은 것들은 사라진다.
이처럼 진화에 친화적인 기구라는 사실이 시장의 놀랄 만한 우수성의 원천이다.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나 하이에크의 ‘발견 절차로서의 경쟁’ 및 ‘자생적 질서’라는 개념들은 멋지지만, 실은 진화 과정의 단면들을 지적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시장과 기업은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나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덜 효율적인 기업들은 ‘창조적 파괴의 폭풍’에 날려가고 거기 담겼던 자원들은 새롭게 쓰여진다.
시장의 모습은 진화에서 얻어진 사회적 지식이다. 모든 생명체들의 몸이 진화에서 얻어진 지식인 것과 같다. 예컨대 수중 동물들이 모두 지닌 유선형의 몸은 물속의 물리적 환경에 관한 지식이다. 따라서 시장의 모습은 산업 구조와 기업지배구조를 포함해서 사회의 소중한 지식이다. ‘발견 절차로서의 경쟁’이나 ‘자생적 질서’는 이 점을 멋지게 표현한다.
시장의 모습은 수많은 사회적 힘들과 요소들이 서로 작용하면서 빚은 작품이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할 뿐 아니라 그 특질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서 어떤 특질만을 떼어내서 바로잡을 수 없다.
시장에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너무 거슬리면, 그것을 바로 손보는 대신 그것을 낳은 사회 환경을 바꾸는 것이 합리적이다. 정부의 힘이 압도적이고 사회가 속속들이 부패했고 경제적 자유주의에 어긋나는 노동조합이 강대한 상황에서 시장의 모습이 모두 아름답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생태계를 대할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겸허함이다. 그런 겸허함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내놓은 청사진인 ‘경제 민주주의’가 실현되면서 명령경제라는 괴물이 나왔다. 시장은 선거를 앞둔 정치가들이 내건 구호에 의해 훼손되기엔 너무나 소중한 지식이다.
복거일 < 소설가 >
경제 민주화는 경제 민주주의(economic democracy)의 실현을 뜻한다. 경제 민주주의는 19세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의 평등화’라는 뜻으로 썼다. 바로 공산주의 경제 체제를 가리킨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이 힘을 잃게 되자 경제 민주주의도 체계적 이론으로 존재하기를 멈췄다.
근년에 경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사소한 정책들을 포장하는 말이 되었다. 우리 사회에선 주로 재벌을 억제하거나 해체하자는 주장을 뜻한다.
그런 주장들의 이론적 바탕은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의 ‘노동량 가치설(quantity-theory of value)’이다. 이 이론은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원시적 이론으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도 오래 전에 버렸다.
이처럼 경제 민주화는 시장에 적대적이다. 시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시장의 움직임에서 나온 결과를 부정한다. 자연히 지금 우리의 시장경제는 근본적인 위협을 맞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려면 시장의 본질에 대해 잘 살펴야 한다.
태초에 시장이 있었다. 국가도 법도 없었을 때도 사람들은 교환을 해서 자신들의 복지를 늘렸다. 국가가 나타나자 시장은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진화해 왔다. 국방과 치안을 통해 재산권이 확립되면서 시장은 발전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잘못되면 시장은 왜곡되고 자라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 국가나 종교는 시장에 적대적이었고 그래서 경제 발전을 어렵게 했다.
진화는 이 세상의 존재를 잘 설명한다. 진화를 통해 생태계와 문화가 나왔고 발전했다. 경제주체들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시장은 진화에 가장 좋은 기구다. 진화는 많은 변이들이 끊임없이 나오고 그런 변이들 가운데 환경에 잘 적응된 것들이 살아남아서 전파된다는 공식을 따른다. 기업들은 늘 보다 나은 제품들과 서비스들을 만들어내고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수요에 맞는 것들을 고르며 그렇게 선택된 제품들과 기업들은 자라나고 버림받은 것들은 사라진다.
이처럼 진화에 친화적인 기구라는 사실이 시장의 놀랄 만한 우수성의 원천이다.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나 하이에크의 ‘발견 절차로서의 경쟁’ 및 ‘자생적 질서’라는 개념들은 멋지지만, 실은 진화 과정의 단면들을 지적했을 따름이다.
따라서 시장과 기업은 당시의 사회적 환경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장 나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덜 효율적인 기업들은 ‘창조적 파괴의 폭풍’에 날려가고 거기 담겼던 자원들은 새롭게 쓰여진다.
시장의 모습은 진화에서 얻어진 사회적 지식이다. 모든 생명체들의 몸이 진화에서 얻어진 지식인 것과 같다. 예컨대 수중 동물들이 모두 지닌 유선형의 몸은 물속의 물리적 환경에 관한 지식이다. 따라서 시장의 모습은 산업 구조와 기업지배구조를 포함해서 사회의 소중한 지식이다. ‘발견 절차로서의 경쟁’이나 ‘자생적 질서’는 이 점을 멋지게 표현한다.
시장의 모습은 수많은 사회적 힘들과 요소들이 서로 작용하면서 빚은 작품이다.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복잡할 뿐 아니라 그 특질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서 어떤 특질만을 떼어내서 바로잡을 수 없다.
시장에서 어떤 부분이 마음에 너무 거슬리면, 그것을 바로 손보는 대신 그것을 낳은 사회 환경을 바꾸는 것이 합리적이다. 정부의 힘이 압도적이고 사회가 속속들이 부패했고 경제적 자유주의에 어긋나는 노동조합이 강대한 상황에서 시장의 모습이 모두 아름답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생태계를 대할 때 우리에게 요구되는 겸허함이다. 그런 겸허함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내놓은 청사진인 ‘경제 민주주의’가 실현되면서 명령경제라는 괴물이 나왔다. 시장은 선거를 앞둔 정치가들이 내건 구호에 의해 훼손되기엔 너무나 소중한 지식이다.
복거일 <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