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두뇌는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주의적 모호함이 있는 것 같아요. 물질과 정신, 논리와 환상이 공존하고 기억의 생성과 순환, 소멸이 일어나는 복합적인 공간이거든요. 마음의 흐름을 형상화한다는 것은 결국 감각에 의존하는 발명 행위입니다.”

서울 대학로 아르코미술관 ‘올해의 대표작가’로 선정돼 초대전을 갖고 있는 이기봉 씨(55·고려대 교수)는 “제 작업은 두뇌 안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판타지화한 것”이라며 “그런 의미에서 저는 몽상적인 장치 예술을 만들어내는 공학자”라고 말했다.

이씨는 물과 안개, 먼지, 거품, 가루 등을 소재로 인간의 심리뿐만 아니라 물체의 구조와 흐름, 거기에서 파생되는 의미와 역학 구조를 2, 3차원 형태로 형상화해왔다. 1986년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그는 모스크바 비엔날레를 비롯해 싱가포르 비엔날레, 호주 트리엔날레, 세비아 비엔날레, 광주 비엔날레 등 굵직한 미술축제에 초대되며 국제적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흐린 방’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근작 설치작품 3점과 대형 회화 6점을 내놓았다. 나타남과 사라짐의 반복 구조를 통해 인간의 기억과 망각, 감성의 속성을 깊숙하게 다룬 작품들이다. ‘독신자-이중신체’는 수족관에서 유영하는 책을 통해 인간의 감성과 상상세계를 은유적으로 풀어낸 작품.

“욕실에서 책 읽는 걸 즐기는 편인데, 어느 날 독일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쓴《인사이트&일루전》을 읽다가 물속에 떨어뜨렸어요. 책이 물속에서 헤엄치는 듯한 모습이 사람의 두뇌를 보는 것 같더라고요. 아름답기도 하면서 여러 가지 의미가 있어 보인다는 생각에 작품화한 거죠.”

이씨는 “우리 두뇌는 물리적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기관인 동시에 지적인 활동과 판타지가 전개되는 신비로운 공간”이라며 “책이라는 지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대상에 물을 조합시켜 인간의 두뇌를 표현했다”고 덧붙였다. 책은 닫혀 있을 때 하나의 견고한 물리적 실체처럼 보이지만 물속에서 펼쳐지는 모습은 한순간에 카오스 상태가 돼버리는 사람의 마음과 유사하다는 얘기다.

대형 회화작품 ‘기억’과 ‘망각’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가로 9m 세로 4.8m 의 대형 설치 작품 ‘클라우디움(cloudium)’과 ‘로멘틱 소마’에서는 거품을 순환시켜 생성과 변화, 소멸하는 과정을 감각적으로 보여준다.

어떻게 안개, 먼지, 물, 거품 등 사라지기 쉬운 속성을 가진 재료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까.

“예컨대 안개, 물, 거품의 느낌은 사물의 거리감이나 존재감에 영향을 미치는데, 보이지 않는 힘의 흐름, 즉 영혼이나 기(氣) 같은 게 느껴지죠. 제 그림에서 관람객은 나무를 보지만, 제가 관심을 갖는 것은 안개예요. 그것은 두 영역을 매개하는 접속사 같은 역할을 하죠. 말하자면 명사가 아닌, 접속사에 의미를 두는 것입니다.”

서울대 미대 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한 이씨는 스스로를 “미술가이자 21세기형 몽상적 과학자”라고 했다. “제가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인간 신체의 속성, 마음의 흐름, 세계의 모습 등 이미 우리 내면과 주위에 존재하는 것들을 스스로 재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장치로서의 작품이거든요.”

이씨는 내달 15일까지 이 전시를 마치고 9월11일부터 24일까지 베이징 얀황미술관에서 펼쳐지는 한·중 수교 20주년 기념 한국 현대미술 대표작가전 ‘리부팅’에 참가한다. (02)760-485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