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국가부도 : 착한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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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
그리스와 스페인 금융위기가 화제다. 국가부도가 목전인 그리스의 아랑곳 없는 선거판세는 흥미진진이다. 자포자기라는 해석도 나온다. 엊그제 한경과 인터뷰를 가진 와튼 스쿨의 프랭클린 앨런 교수는 70년대처럼 그리스 군부가 재집권하는 상황까지 입에 올렸다. 그렇게 되면 기차는 다시 아그네스 발차의 구성진 목소리에 실려 8시에 플랫폼을 떠나야 한다. 군부독재 하에서 정치범들을 실어나르던 눈물의 야간 열차다. “긴축도 싫고, 유로 탈퇴도 싫다. 그냥 이렇게 살면 안 되냐”고 그리스인들은 절규하고 있다. 이쯤 되면 조르바도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스페인에서의 즐거웠던 ‘축제의 그밤’도 끝났다. 이제 술에 취해 휘갈겨 쓴 자필 청구서가 날아들 뿐이다. 축제는 10년이나 계속돼 오히려 일상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다. 유로화 이전 스페인 국채 가산금리는 15%였다. 유로화 이후엔 0% 선까지 떨어졌다. 이렇게 좋을 수가 없는, 정말 달콤한 공짜 돈이었다. 남미에서 금과 은을 훔쳐 실어나른 지 그 얼마 만의 공짜인가. 그러나 역시 청구서가 날아온다. 여기에는 실업률 25%, 청년실업률 52%라고 쓰여져 있다. “누군가 책임을 지겠지. 우리는 정당만 바꾸면 된다네. 자, 축배를!”
이때 누군가 판을 깨는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IMF 때처럼 다시 금을 모을 수 있을까?” 저녁 모임의 흥취는 이 말로 쪽박처럼 깨진다. 불가능할 것이라는 결론이 너무도 쉽게 나온다. 국민들에게 땀과 노력을 호소하는 지도자가 사라진 지 오래다. 정치는 돈을 뿌리고 복지 마약을 먹인다. 단 독일은 빼고-! 그렇다. 독일은 예외다! 독일은 그리스가 망해도 돈을 내고 스페인이 망해도 돈을 낸다. 유럽안정기금(EFSF)에 가장 많은 분담금을 내는 곳도 독일이다. 남유럽국을 상대로 10여년이나 알토란 같은 대칭형 무역흑자를 쌓았으니 돈을 내라면 내는 것도 맞다?
그러나 독일 책임론은 무책임하다. 2000년을 100으로 놓았을 때 지금 유럽에서 노동비용이 가장 싼 곳이 독일이다. 1단위 노동비용은 그리스 스페인 이탈리아보다 독일이 30%포인트 이상 싸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을 단행한 결과가 지금 독일의 경쟁력이다. 그런데 왜 돈을 내나? 네 차례에 걸쳐 단행된 하르츠 위원회의 노동시장 개혁은 백미다. 실업급여 기간과 임금보전 비율을 대폭 낮추고 실업보조를 사회보장 수준까지 인하한 정당은 우익이 아니라 좌익 사민당이었다. 지자체들의 복지 퍼주기도 금지되었다. 사민주의의 자기학대라고 비야냥대던 자들은 지금 입을 닫고 있다. 산별노조 체제도 붕괴되었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임금은 삭감되고…. 68문화혁명 당시 머리 띠를 둘렀던 학생운동 지도가가 바로 슈뢰더였다. 그는 그렇게 전향서를 썼다.
그리스는 정부 보조금에 아예 찌들어 산다. 국민의 4분의 1이 공무원이다. 그래서 긴축을 하면 그것보다 더빨리 경제성장 속도가 떨어진다. 소위 재정승수가 너무 크다. 악순환이다. 그래서 긴축조차 할 수 없는 나라가 그리스다. 악순환을 깨는 유일한 방법은 차라리 유로화 탈퇴다. 자기실력에 걸맞은 화폐를 쓸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국부는 60%까지 삭감된다. 국민소득은 2만7000달러에서 1만4000달러로 떨어진다. 놀랍게도 스페인에 대한 구제금융에는 아무런 조건도 없다. 1997년 무려 160건의 크고 작은 구조조정을 당했던 한국인으로서는 피가 솟는다. 그렇게 금리와 환율이 치솟고 대우가 망했다. 금융사가 문을 닫고 실업자가 넘쳐났다.
차제에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구제금융 협상의 형평성이다. 한국은 빚 탕감은커녕 채권자들에게 이자를 더 붙여주었다. 그리스만 해도 53%를 탕감했다. 아니 구제금융의 본질이 빚 청산이다. 그러나 한국만 퍼주었다. 이런 수준의 봉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한국밖에 없다. 어처구니 없게도 자신이 98년 구제금융 협상을 선두에서 잘 이끌었노라고 자서전을 펴낸 전직도 있다. 참, 이상한 자들이다.
정규재 논설실장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