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예측 도입 한 달…곳곳서 '잡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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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은 금리로 발행 강요…증권사 울며 겨자먹기 수용
'일괄신고' 활용하는 기업도
▶ 마켓인사이트 5월25일 오전 8시6분 보도
회사채 수요예측 제도가 지난달 17일 도입됐음에도 불구하고 회사채 발행시장의 문제들은 거의 개선되지 않고 있다. 발행기업은 여전히 시장금리보다 낮은 발행금리를 요구하고, 증권사들은 출혈경쟁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수요예측 제도의 취지대로 발행금리 왜곡을 막고 증권사 인수역량을 강화하기 위해선 문제점에 대한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희망밴드가 발행금리로 ‘변질’
27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증권사들은 대표주관사를 선정하기 위한 입찰을 실시할 때부터 수요예측 결과와 상관없이 사전에 일정 수준의 발행금리를 보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발행기업이 증권사별로 ‘발행 보장금리’를 ‘희망공모금리 밴드(이하 희망밴드)’ 형태로 제출하도록 사실상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가 제정한 수요예측 모범규준에 따르면 희망밴드는 투자자들이 수요예측에 참여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실제 수요에 최대한 가까운 수준으로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참고’ 금리에 불과한 희망밴드가 실질적인 보장금리로 변질됐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한 관계자는 “수요가 거의 없더라도 희망밴드를 최대한 낮게 제시하려 애쓰고 있다”며 “최악의 경우에도 밴드 상단에선 발행을 성사시켜야 하기 때문에 감내할 수 있는 손실을 포함한 최저금리를 밴드 상단에 쓰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점은 회사채 수요예측 결과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최근 수요예측 결과를 발표한 한국캐피탈 AJ렌터카 신한금융지주 코오롱글로벌 대성산업가스 SK 등 11개사 증권신고서를 보면 발행금리가 희망밴드 상단을 넘어선 회사는 한 곳도 없다. 코오롱글로벌 대성산업가스 SK 등 5개사는 발행금리가 정확히 희망밴드 상단에서 결정됐다.
○모호한 유효수요 판단 기준
금투협 수요예측 모범규준은 ‘유효수요 여부에 대한 판단’을 자율에 맡김으로써 대표 주관사가 희망밴드 상단으로 발행금리를 제한할 수 있는 길을 사실상 열어두고 있다. 유효수요란 과도하게 높거나 낮은 금리로 참여한 물량을 뺀 실질적인 참여물량을 말한다.
모범규준에 따르면 증권사들은 수요예측 참여물량 미달로 잔여물량을 떠안을 때 유효수요 중 가장 높은 금리 미만으로 회사채를 인수해선 안 된다. 하지만 유효수요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없다. 대성산업가스의 경우 5년물 1000억원 발행 수요예측(희망밴드 연 4.47~4.67%)에 기관투자가들이 3건 500억원 규모로 참여했다. 이 중 100억원은 연 4.7%를 웃도는 금리로 참여했는데 이를 유효수요에서 배제함으로써 발행금리가 희망밴드 상단(연 4.67%)으로 결정됐다.
증권사들이 실제 수요와 관계없이 낮은 금리(비싼 가격)에 회사채를 인수하면 매매손실을 보면서라도 높은 금리(싼 가격)에 되팔아야 한다. 이런 구조를 해소하지 못하면 수수료수입과 매매손실이 비슷해지는 이른바 ‘수수료 녹이기’ 관행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일괄신고로 눈돌리는 기업들
일부 기업들은 ‘일괄신고’ 형태로 아예 회사채 발행 방식을 전환하고 있다. 일괄신고란 1년 이내에 발행할 금액을 한번에 신고하고 연 3회 이상에 걸쳐 기업이 원할 때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조달전략이 노출되는 단점이 있지만 수요예측 제도가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 발행 방식을 선호하는 기업들에 도피처로 활용되고 있다.
기업실사도 약식으로 진행해 발행비용과 기간을 줄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신한금융지주는 지난달 처음 일괄신고 방식으로 10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했고, 아주캐피탈과 KB국민카드도 일괄신고 대열에 합류했다.
증권사 관계자는 “수요예측을 피하고 싶은 기업들은 일괄신고 전환을 통해 발행시장에서 우월적 지위를 계속 유지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호/김은정 기자 t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