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주년 회고전 여는 한국 최초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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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십 평생 빨간옷은 진짜로 처음 입어보네요. 괜찮나요?”
서울 청담동 노라노 본사에서 만난 국내 최초의 디자이너 노라노 씨(본명 노명자·84)는 “난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전부 블랙만 입는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23일부터 내달 2일까지 서울 신사동 호림미술관에서 ‘라비엥 로제’(장밋빛 인생)라는 60주년 기념 회고전을 여는 그는 최초의 미국 유학 디자이너, 미니스커트와 판타롱 바지의 창시자, 파리컬렉션에 처음 참가한 한국인, 국내 첫 패션쇼 개최 등 하는 일마다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노 디자이너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니까 다 처음이 된 거지 내가 제일 먼저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며 “뭔가 목적의식을 가지면 오래 못하는 법”이라고 했다. 노장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가 난생 처음 입어봤다는 빨간색 옷은 1985년 잡지 보그의 미국판 광고에 나온 제품이다. 당시엔 블라우스와 재킷을 다 갖춰 입었지만 노 디자이너의 ‘블라우스형 재킷’은 하나로 두 가지 효과를 내는 것은 물론 체형에 관계 없이 누구나 입을 수 있어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품이었다. 1970년대 뉴욕 삭스백화점, 블루밍데일즈백화점 등에서 ‘잘 팔리는 브랜드‘가 된 것도 갑갑했던 여성들의 의상을 ‘패셔너블하고 편하게’ 바꿔놓은 덕분이다.
노 디자이너는 “입기 편하고 예뻐야 옷이지 사람보다 더 튀는 건 옷이 아니다”며 “어디까지나 입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옷”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그는 이어 “과거 100년 동안의 여성 옷은 그 이전 1000년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지만 향후 100년은 ‘패션이 없는 패션’(안티패션)이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금까진 소수의 사람이 만든 옷을 모두가 따라입는 시스템이었다면 앞으로는 누구나 자기가 입고 싶은대로 입는 시대라는 설명이다.
8·15 해방(1945년)과 5·16 쿠데타(1961년) 등 격정의 시대를 겪은 노 디자이너는 그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여걸’이었다. 1948년 한복을 재해석한 ‘아리랑드레스’가 주한 외교관의 부인 등 고위직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귀국하자마자 대사관 부인 등 파티에 참석하는 여성들의 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했고 1956년 반도호텔에서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파리 연수, 영화·드라마 의상 제작을 하다가 1971년부터 3년 연속 파리컬렉션에 무대를 올렸다. 그즈음 미국 백화점에도 입점했는데 활동성을 살리기 위해 허리에 주름을 잡은 스트라이프 원피스(품번 5075)는 1975년 미국에서 크게 히트를 쳤다.
이런 노라노의 도전정신과 창의적인 디자인을 한데 모아 한국 디자인의 역사로 남기기 위해 마련한 것이 바로 ‘라비엥 로제’ 전시다. 패션잡지 바자에서 초년생 기자로 노 디자이너를 처음 만난 서은영 스타일리스트(아장드베티 이사)가 기획한 이번 행사는 기아자동차가 협찬했다. 코오롱스포츠, 정구호 디자이너(제일모직 전무), 슈즈 브랜드 슈콤마보니와 주얼리 브랜드 미네타니 등 여러 브랜드에서 만든 헌정 기념 콜라보레이션(협업) 제품도 함께 전시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의 공신은 바로 500명에 달하는 단골 손님들이다. 노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한 단 한벌뿐인 자신의 맞춤복을 기꺼이 기증한 사람만 300명이 넘는다. 지난 3년여 동안 서울은 물론 하와이, 파리, 영국 등 전세계에 퍼져있는 단골들이 옷을 보내왔다. 400여벌 의상 중 60벌 가량을 골라 이번 전시회에서 연도별로 선보인다.
노 디자이너는 “2대, 3대에 걸쳐 제 옷을 입는 단골들은 셀 수 없이 많고 심지어 4대째 오시는 분들도 있다”며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이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60년 전 ‘노라의 집’ 의상실을 처음 열던 날 오셨던 세 분의 고객이 지금까지 단골”이라며 “이번 전시회에서 그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그는 “맞춤복만 하다가 처음으로 기성복을 했을 때 ‘맘대로 골라서 입어보고 사는 옷’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는데 손님들이 굉장히 좋아했다”며 “더 좋은 옷을 더 싼값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입히고 싶었다”고 답했다. 노 디자이너는 “당시 신문엔 ‘과연 기성복이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는 비판적인 기사가 실리기도 했는데 지금 보면 참 재밌다”며 “앞으로도 뭐가 됐든 신나고 재미있는 일을 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15년 동안 판매하다가 2000년도에 중단했던 미국 사업도 올 가을부터 재개할 예정이다. 노 디자이너는 “시장이 작으면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좀더 큰 시장에 나가야 글로벌 시대에 발전할 수 있다”며 “젊은 후배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일을 해주니까 해외 사업도 전시회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패션의 뿌리를 찾자는 젊은이들의 제안에 너무 감동을 받았고 이건 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했다.
여든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했다. 노 디자이너는 “매일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서 당근 파프리카 오이 토마토 샐러리 등을 갈아만든 주스를 마시고 45분 스트레칭한 뒤 도산공원을 3바퀴씩 돈다”며 “비가 와도 그냥 생각 없이 스케줄대로 산책을 한다”고 답했다. 하루라도 거르면 하기 싫어지기 때문이라고. 그는 40대엔 댄스파티에서 춤을 추는 것으로 건강관리를 했고 50대부터는 산을 타기 시작했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스트레스는 안 받는다”는 그는 “지금까지 내가 하고싶은 대로 다 했고 또 잘 팔렸기 때문에 아주 신날 수밖에 없다”며 웃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화보 촬영 의상을 고르러 온 영화 ‘은교’의 여주인공 김고은 씨에 대해 노 디자이너는 “손녀도 아니고 증손녀뻘”이라고 했다. “1950년대 의상을 지금 입어도 예쁘잖아요. 패션은 그래야죠.”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
서울 청담동 노라노 본사에서 만난 국내 최초의 디자이너 노라노 씨(본명 노명자·84)는 “난 겉옷은 물론 속옷까지 전부 블랙만 입는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23일부터 내달 2일까지 서울 신사동 호림미술관에서 ‘라비엥 로제’(장밋빛 인생)라는 60주년 기념 회고전을 여는 그는 최초의 미국 유학 디자이너, 미니스커트와 판타롱 바지의 창시자, 파리컬렉션에 처음 참가한 한국인, 국내 첫 패션쇼 개최 등 하는 일마다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다. 노 디자이너는 “그냥 하고 싶은 일을 하다보니까 다 처음이 된 거지 내가 제일 먼저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며 “뭔가 목적의식을 가지면 오래 못하는 법”이라고 했다. 노장의 여유가 느껴졌다.
그가 난생 처음 입어봤다는 빨간색 옷은 1985년 잡지 보그의 미국판 광고에 나온 제품이다. 당시엔 블라우스와 재킷을 다 갖춰 입었지만 노 디자이너의 ‘블라우스형 재킷’은 하나로 두 가지 효과를 내는 것은 물론 체형에 관계 없이 누구나 입을 수 있어 당시로선 파격적인 제품이었다. 1970년대 뉴욕 삭스백화점, 블루밍데일즈백화점 등에서 ‘잘 팔리는 브랜드‘가 된 것도 갑갑했던 여성들의 의상을 ‘패셔너블하고 편하게’ 바꿔놓은 덕분이다.
노 디자이너는 “입기 편하고 예뻐야 옷이지 사람보다 더 튀는 건 옷이 아니다”며 “어디까지나 입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옷”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그는 이어 “과거 100년 동안의 여성 옷은 그 이전 1000년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지만 향후 100년은 ‘패션이 없는 패션’(안티패션)이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지금까진 소수의 사람이 만든 옷을 모두가 따라입는 시스템이었다면 앞으로는 누구나 자기가 입고 싶은대로 입는 시대라는 설명이다.
8·15 해방(1945년)과 5·16 쿠데타(1961년) 등 격정의 시대를 겪은 노 디자이너는 그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여걸’이었다. 1948년 한복을 재해석한 ‘아리랑드레스’가 주한 외교관의 부인 등 고위직 사이에서 인기를 끌자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귀국하자마자 대사관 부인 등 파티에 참석하는 여성들의 드레스를 만들기 시작했고 1956년 반도호텔에서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파리 연수, 영화·드라마 의상 제작을 하다가 1971년부터 3년 연속 파리컬렉션에 무대를 올렸다. 그즈음 미국 백화점에도 입점했는데 활동성을 살리기 위해 허리에 주름을 잡은 스트라이프 원피스(품번 5075)는 1975년 미국에서 크게 히트를 쳤다.
이런 노라노의 도전정신과 창의적인 디자인을 한데 모아 한국 디자인의 역사로 남기기 위해 마련한 것이 바로 ‘라비엥 로제’ 전시다. 패션잡지 바자에서 초년생 기자로 노 디자이너를 처음 만난 서은영 스타일리스트(아장드베티 이사)가 기획한 이번 행사는 기아자동차가 협찬했다. 코오롱스포츠, 정구호 디자이너(제일모직 전무), 슈즈 브랜드 슈콤마보니와 주얼리 브랜드 미네타니 등 여러 브랜드에서 만든 헌정 기념 콜라보레이션(협업) 제품도 함께 전시할 예정이다.
이번 전시의 공신은 바로 500명에 달하는 단골 손님들이다. 노 디자이너의 손에서 탄생한 단 한벌뿐인 자신의 맞춤복을 기꺼이 기증한 사람만 300명이 넘는다. 지난 3년여 동안 서울은 물론 하와이, 파리, 영국 등 전세계에 퍼져있는 단골들이 옷을 보내왔다. 400여벌 의상 중 60벌 가량을 골라 이번 전시회에서 연도별로 선보인다.
노 디자이너는 “2대, 3대에 걸쳐 제 옷을 입는 단골들은 셀 수 없이 많고 심지어 4대째 오시는 분들도 있다”며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이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그는 “60년 전 ‘노라의 집’ 의상실을 처음 열던 날 오셨던 세 분의 고객이 지금까지 단골”이라며 “이번 전시회에서 그분들께 감사의 뜻을 전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묻자 그는 “맞춤복만 하다가 처음으로 기성복을 했을 때 ‘맘대로 골라서 입어보고 사는 옷’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걸었는데 손님들이 굉장히 좋아했다”며 “더 좋은 옷을 더 싼값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입히고 싶었다”고 답했다. 노 디자이너는 “당시 신문엔 ‘과연 기성복이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는 비판적인 기사가 실리기도 했는데 지금 보면 참 재밌다”며 “앞으로도 뭐가 됐든 신나고 재미있는 일을 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15년 동안 판매하다가 2000년도에 중단했던 미국 사업도 올 가을부터 재개할 예정이다. 노 디자이너는 “시장이 작으면 생산성이 낮기 때문에 좀더 큰 시장에 나가야 글로벌 시대에 발전할 수 있다”며 “젊은 후배들이 팔을 걷어부치고 일을 해주니까 해외 사업도 전시회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패션의 뿌리를 찾자는 젊은이들의 제안에 너무 감동을 받았고 이건 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얼굴엔 뿌듯함이 가득했다.
여든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궁금했다. 노 디자이너는 “매일 아침 5시30분에 일어나서 당근 파프리카 오이 토마토 샐러리 등을 갈아만든 주스를 마시고 45분 스트레칭한 뒤 도산공원을 3바퀴씩 돈다”며 “비가 와도 그냥 생각 없이 스케줄대로 산책을 한다”고 답했다. 하루라도 거르면 하기 싫어지기 때문이라고. 그는 40대엔 댄스파티에서 춤을 추는 것으로 건강관리를 했고 50대부터는 산을 타기 시작했다.
“워낙 낙천적인 성격 덕분에 스트레스는 안 받는다”는 그는 “지금까지 내가 하고싶은 대로 다 했고 또 잘 팔렸기 때문에 아주 신날 수밖에 없다”며 웃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화보 촬영 의상을 고르러 온 영화 ‘은교’의 여주인공 김고은 씨에 대해 노 디자이너는 “손녀도 아니고 증손녀뻘”이라고 했다. “1950년대 의상을 지금 입어도 예쁘잖아요. 패션은 그래야죠.”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