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장삼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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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투고 미워하는 까닭은 '스스로 부처'라는 걸 모르기 때문
김희옥 < 동국대 총장 khobud@dongguk.edu >
김희옥 < 동국대 총장 khobud@dongguk.edu >
“석가도 미륵도 그의 종이다. 그는 누구인가?”
중국 선불교 전통에 이런 물음이 있다. 스승이 제자를 일깨우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내는 것이다. 멈출 여유도 없다. 즉문즉답만이 진짜를 가려낸다. 듣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이 문제의 답은 호장삼흑이사(胡張三黑李四)다. 중국 성씨 중 흔한 장씨와 이씨처럼 ‘많고 많은 보통사람’이란 뜻이다. 보통은 ‘장삼이사’로 알려졌는데 여기에 호(胡)와 흑(黑)이 더 붙었다. ‘볼품없고’ ‘꾀죄죄한’ 정도의 뜻이다. 우리들 주변의 볼품없고 꾀죄죄한 사람들이 석가와 미륵의 주인이란 뜻이 되겠다. 이를 두고 굳이 반어법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충격을 주기 위해 일부러 반대로 말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고 선사들은 말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서민들, 혹은 하루를 고달프게 살다가는 가난한 보통사람들이 세상의 진짜 주인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있다. 사찰마다 아름다운 연등이 내걸리고 사람들 마음에도 무명의 어둠을 밝히려는 마음의 등불이 켜지고 있다. 불 밝힌 연등을 바라보노라면 신비한 경험을 곧잘 하게 된다. 연등은 어둠을 물리치는 상징이다. 횃불처럼 이글거리지도 않고 서치라이트처럼 강렬하지도 않다. 그저 조용히 주변을 편안하게 밝힌다. 보이지 않는 답답함과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래서 등불을 드는 순간은 곧 ‘밝은 주인’이 되는 원초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큰 이유는 대대손손 모든 인류들이 석가세존이라는 브랜드를 받들어 모시라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부처이므로 자기 자신이 주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인간혁명을 선언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투고 미워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가 부처’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요, ‘내가 곧 세상 모두와 하나’라는 경험을 지속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모든 사람을 부처님 대하듯 하면 매사에 너그러워지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된다. 그가 어떤 종교를 가지건 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우리 선불교 전통은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 이전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캐묻다보면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이는 지식으로 아는 단계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경지다. 고요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한 이 경지는 세상과 하나 된 나의 참모습이자 스스로가 세상의 ‘밝은 주인’임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밝은 주인’의 참모습은 호장삼흑이사 누구에게도 가득 차 있다는데 우리는 매일매일 고달프고 안타깝다. 1%와 99%,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갈등은 그칠 줄 모른다. 뭇 생명들이 ‘밝은 주인’의 마음으로 함께 만나는 정신혁명의 축제가 간절해진다.
김희옥 < 동국대 총장 khobud@dongguk.edu >
중국 선불교 전통에 이런 물음이 있다. 스승이 제자를 일깨우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문제를 내는 것이다. 멈출 여유도 없다. 즉문즉답만이 진짜를 가려낸다. 듣는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이 문제의 답은 호장삼흑이사(胡張三黑李四)다. 중국 성씨 중 흔한 장씨와 이씨처럼 ‘많고 많은 보통사람’이란 뜻이다. 보통은 ‘장삼이사’로 알려졌는데 여기에 호(胡)와 흑(黑)이 더 붙었다. ‘볼품없고’ ‘꾀죄죄한’ 정도의 뜻이다. 우리들 주변의 볼품없고 꾀죄죄한 사람들이 석가와 미륵의 주인이란 뜻이 되겠다. 이를 두고 굳이 반어법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충격을 주기 위해 일부러 반대로 말한 게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고 선사들은 말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서민들, 혹은 하루를 고달프게 살다가는 가난한 보통사람들이 세상의 진짜 주인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있다. 사찰마다 아름다운 연등이 내걸리고 사람들 마음에도 무명의 어둠을 밝히려는 마음의 등불이 켜지고 있다. 불 밝힌 연등을 바라보노라면 신비한 경험을 곧잘 하게 된다. 연등은 어둠을 물리치는 상징이다. 횃불처럼 이글거리지도 않고 서치라이트처럼 강렬하지도 않다. 그저 조용히 주변을 편안하게 밝힌다. 보이지 않는 답답함과 공포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킨다. 그래서 등불을 드는 순간은 곧 ‘밝은 주인’이 되는 원초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이 이 땅에 오신 큰 이유는 대대손손 모든 인류들이 석가세존이라는 브랜드를 받들어 모시라는 게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부처이므로 자기 자신이 주인 아닌 사람이 없다는 인간혁명을 선언하고 이를 알리기 위해 오신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투고 미워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가 부처’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요, ‘내가 곧 세상 모두와 하나’라는 경험을 지속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모든 사람을 부처님 대하듯 하면 매사에 너그러워지게 되고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된다. 그가 어떤 종교를 가지건 간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우리 선불교 전통은 부모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 이전의 본래 모습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캐묻다보면 자기의 참모습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이는 지식으로 아는 단계가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경지다. 고요하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한 이 경지는 세상과 하나 된 나의 참모습이자 스스로가 세상의 ‘밝은 주인’임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하다.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온다. ‘밝은 주인’의 참모습은 호장삼흑이사 누구에게도 가득 차 있다는데 우리는 매일매일 고달프고 안타깝다. 1%와 99%,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의 갈등은 그칠 줄 모른다. 뭇 생명들이 ‘밝은 주인’의 마음으로 함께 만나는 정신혁명의 축제가 간절해진다.
김희옥 < 동국대 총장 khobud@dongguk.edu >